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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6일 야곱의 우물-마르 7,31-3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6 조회수502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사람들 중에는 닫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열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닫힌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울증이나 자폐증 같은 질병이 닫힌 마음에서 오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도 삶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놓을 수 있다면 자살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상처로 인해 사람 관계가 닫힐 수도 있고, 귀가 닫혀 중요한 것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눈이 닫혀서 정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열린 마음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에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마다 “하늘이 열리며”(루카 3, 21)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묶는 것이 사탄의 역사라면, 여는 것은 하느님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생각을 묶고 마음을 묶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좌절로 사람 관계를 닫아버리고 다른 무엇엔가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 17)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닫힌 삶을 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마르 8, 32)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농아’라고 부르는 청각과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귀가 닫혀서 말을 더듬습니다.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정상적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청각과 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면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 듣지 못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장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을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귀가 닫혀 들을 수 없게 되면 말도 못하고 의사소통도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보다 듣지 못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주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귀가 닫혀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주님과 대화도 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목적과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32절) 간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얹어 고쳐줘도 될 텐데 이번에는 병자만 따로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 접촉이 아니라 개인 접촉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33절)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6, 5) 고쳐주시든지 아니면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 28)라는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특이하게 사람들을 피해 따로 조용한 곳으로 단둘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양 귀에 댔다가 다시 침을 발라 그 사람의 혀에 댔습니다. (마르 8, 33 참조)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한 인간의 삶에 ‘나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닫혀 있는 두 귀를 만져주시고, 말문을 닫아버린 혀에 손을 대심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시켜 주십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고쳐주시지 않고 만져주시며 느끼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자를 바라보기만 한 것으로 치유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직접 다가가셔서 만져주심으로써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닫힌 마음을 열리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적 장애도 문제이지만 영적 장애는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복음에 나타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이야기는 영적으로 닫혀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말씀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이웃을 향해 입을 닫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3, 2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는데도 끝내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요, 생명은 있으되 영생의 기회를 잃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문은 있되 누구나 열 수 있는 시골의 싸리문처럼 열린 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버지 말씀만 듣고 아버지 말씀만 하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열린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린 삶에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졌듯이 우리도 예수님께 열린 삶을 살 때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얽히고설킨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갑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잘못되는 일 없이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바로잡아 주시어 다 잘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비뚤어지고 잘못된 것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우리가 있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열린 삶’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합시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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