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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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4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6 조회수400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복음입니다. [연중 제23주일]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이번 인사이동으로 새로 부임하신 주임신부님께서 주례하는 미사에 첫 참례하는 주일입니다. 하여 많은 기대를 가지고 오늘 주일미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느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우리 몸에는 눈과 귀, 코와 혀 등 네 개의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혀는 감각기관인 동시에 우리가 인식한 감각을, 즉 입력된 정보를 외부로 발설하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눈과 귀, 코는 입력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면 혀는 출력기능도 함께 수행하고 있습니다.

통상 말을 못하는 것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은 어느 사람의 귀와 혀를 동시에 치료하여 막힌 귀를 뚫으시고 묶인 혀를 풀리게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저도 혀가 묶여 있다는 사실을 많이 느끼고 있으므로 묶인 혀를 푸는 것이 오늘 복음을 제대로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으므로 그동안 묶어 둔 혀에서 한 올은 풀어야 하겠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오늘은 이번 신부님들의 인사발령으로 새로 부임하시는 신부님께서 주례하시는 첫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날이어서 신부님들의 인사발령과 관련하여 의아하게 생각하였던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작년 8월 사제단 대표신부님이신 전 종훈 신부님은 1년 안식년 발령이 났습니다. 본인이 원치 않는 1년의 안식년 인사발령을 두고 말들이 참 많았습니다.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김 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비리 사건을 고발한 것 때문에, 시청 앞에서 촛불미사를 주도한 것 때문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안식년 발령을 낸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에 전 종훈 신부님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 신부님이 주례하시는 수락산 성당의 마지막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1년 동안 안식년을 잘 보내시기를 기도하는 일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여 신부님이 봉직하고 계시는 수락산 성당의 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제 본당을 말씀드리고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 미사에 참례하러 온 교우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 주십사하고 말씀드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일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제 1년이 되었으므로 이번 인사에는 당연히 전 종훈 신부님의 인사발령이 있을 것이라 믿고 인사발령을 다운받아 확인하였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신부님의 이름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안식년 1년이 지났으므로 당연히 인사발령이 났어야 함에도 인사발령을 하지 않은 이런 부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말못하는 혀를 풀어 주신 오늘 복음의 의미를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의 묵상이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새는 언제나 두 날개로 날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 날개에 이상이 있으면 그 새는 날지 못하여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영성을 중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 사회의 불의와 위선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는 예언자의 소명을 다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예언자적 소명 때문에 우리 신앙은 불의한 세력과 늘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을 계기로 그동안 김 추기경님께서 남긴 말씀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특히 기억에 남는 말씀은 추기경님의 평전인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구중서 지음)에서 김 추기경님께서는 "기복 성향의 기도에 자족하는 신자들의 교회는 잠든 교회다. 불의의 독재정치로 인권과 민주주의가 없는 암흑의 시대에 교회가 침묵만 지킨다면 그리스도가 짊어진 십자가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신 말씀으로 현실 참여를 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전두환 정권시절에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하여 들어 왔을 때에는 그들을 검거하려는 경찰을 향해서 "나를 밟고, 내 뒤의 신부들을 밟고, 그 뒤의 수녀들을 밟은 연후에나 학생들에게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교회를 찾아 온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으로 맞섰습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하신 이런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벌써 여러 권의 책이 발간되었고 우리 천주교의 자긍심을 우리 모두에게 심어주셨습니다. 또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되신 여러 말씀과 실천 덕분에 우리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지금 나날이 늘고 있으며 우리 교회에 입교하고자 하는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우리 교회가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던 여러 일들이 첫번째 이유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불교계 일각에서는 우리 천주교가 불교를 살렸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있으므로 현실 참여가 부족하였으나 자신들에게 부족한 현실 참여를 우리 천주교에서 배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내부에서는 이런 분들을 박해하고 있으며 그 박해의 방법으로 인사에서 불이익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신부님들에게는 인사상 불이익이란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제로서 그 직분에 충실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사제의 길입니다. 하여 저는 인사상 불이익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묵묵히 사제의 길을 가고 계시는 신부님들이시기에 신부님들을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제들이시기에 장상의 입장에서 소속 사제의 행동이 설사 맘에 들지 않더라도 1년 안식년이면 충분한 것이며 그 이상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성스러운 사제의 길을 무참히 짓밟는 반성경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함에도 전 종훈 신부님께서 1년 안식년이 지났음에도 인사발령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에 이의를 제기한 어느 소리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미사 시작전에 사제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사제를 위한 기도를 하면 뭘 하겠습니까? 사회 불의를 고발하였다고 우리 교회가 사제를 버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처럼 완고하고 관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행위를 사제에게까지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제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교회를 위한 기도가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하늘의 소리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실정이므로 평신도들의 소리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교회에 대하여 이런 귀머거리 교회가 더 이상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저희들에게 교회의 이런 부당한 처사에 혀가 묶인 벙어리처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저희들은 묶인 혀를 풀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조금 열린 혀마저도 순명이라는 오라줄에 더 꽁꽁 묶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신심이 흔들릴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제 믿음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 교회에 대하여 실망이 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 믿음을 흔들고 있음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 역사에 정당성이 결여된 이유로 사제가 원하지 않는 안식년발령을 낸 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안식년 1년이 지났음에도 사제에게 그 어떤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 이런 일이 또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의정부 교구에 속한 제 형님이 다닌 성당은 이번 인사에서 보좌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가셨지만 신부님이 부족하여 보좌신부님이 오시지 않아서 새벽미사를 폐지하는 등 전례시간을 다시 조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제가 부족한 실정임에도 약속한 1년의 안식년 기간이 지났음에도 인사발령을 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다분히 감정적인 처사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에게 솔선수범을 보여줘야 할 우리 교회가 이처럼 관용이란 찾아볼 수 없고 포용력이 부족하다면 저희는 교회에서 과연 뭘 배워야 합니까? 우리 교회 내부에서마저 정당한 신앙적인 행위를 나와 관점이 다르다하여 배척한다면 어떻게 용서와 사랑을 저희에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자식끼우는 부모된 입장이라 제 걱정도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교회를 걱정해야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고, 오늘 묵상과 같은 이런 묵상을 하게끔 만드는 우리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 한심한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나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 자신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귀한 말씀을 묵상하며 그간의 제 삶을 반성하고자 노력하기에 여러 부정적인 생각들을 힘들게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서둘러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교훈으로 삼는 점은,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耳順은 육십 나이가 되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으로 지금껏 이해하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耳順은커녕 더 완고해지고 고집불통으로 변해가며 독선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이를 경계하라는 말씀인듯 하여 耳順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제 자신을 반성하며 마침기도로 오늘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의 몸을 저희에게 먹히기까지 하시며
소통을 위해 저희의 귀를 뚫려주시고 묶인 혀를 풀어주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전히 세상의 고통소리에는 귀를 닫고 있으며
혀는 묶여서 말못하는 벙어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당한 이번 우리 교회의 인사발령에도 모두가 침묵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세상의 불의에 그나마 그 어느 누가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세상의 고통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전할 수 있는
소통과 자비와 관용의 성령님을 보내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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