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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44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10 조회수415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조건 없는 용서와 자비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 말씀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라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완전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고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완전하시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서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는데 우리 신앙의 참 목적이 있으며 기복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을,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빌어야 하므로 교회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일부 교회에서는 이런 신자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은 그 어떤 속박에서도 벗어나서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처럼 관점이 다른 두 신앙관이 한 집에서 동거하고 있으므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진리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내 남편의 사업이 잘되게 하여 주시고, 내 아들,딸이 잘되게 하여 주십사하고 비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신앙관인 것 같습니다. 이런 기복신앙관을 가진 분들이 하느님께 빌던, 부처님께 빌던, 정화수 떠놓고 신령님께 빌던 그것을 탓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가지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다투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개신교 신자들이 특히 유별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기복신앙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실상은 이런 기복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제 집사람도 이런 신앙관을 가지고 있지만 저도 옆에서 지켜만 볼뿐 탓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들의 신앙관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 가르침을 배워서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이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공격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에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으므로 이점이 안타갑기도하고 이런 점은 우리 교회 발전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시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원수는 어떤 사람일까요? 제 원수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제게는 아직 원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원수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를 다시 세분하면 나를 미워하고, 나를 저주하며 학대하는 자들처럼 내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자와 내 뺨을 때리는 자들처럼 제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자 그리고 내 물건을 훔쳐가는 자들처럼 제 재물에 손해를 입히는 자들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제게 피해를 주는 자를 모두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 원수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부단히 노력하면 아마 죽는 그 순간이 되면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고 용서하고 눈은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결국 용서하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 그 어떤 사람이던 설사 내 원수라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차별 없이 대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용서하라 하셨다 하여 내게 잘못한 이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용서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존경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성의 씨앗인 자비심을 키워나가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 교인인지의 척도는 자비심이며, 성직자와 평신도, 성직자 중에서도 고위 성직자, 평신도 중에서도 입교가 오래된 사람, 또는 신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사람,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런 잣대로 참 신앙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에 앞서 사랑을 선점하였다면 불교는 자비를 선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 복음은 사랑으로 말문을 여시고 자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비에 있다 하겠습니다. 저는 제 영세신부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하셔서 처음에는 불교적 색채가 짙어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말씀을 묵상하며 제 무지를 조금이나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직설적 표현으로 알려주신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직유법으로 직접 알려주신 말씀은 복음서 전체에서 오직 두 번에 불과하며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셨으 다른 또 하나의 말씀은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느님을 자비하시고 완전하신 분으로 알려주셨으므로 저는 제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것은 다 잊고 오직 이 두 말씀만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사람은 내가 용서하는 주체가 아니므로 피해를 당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하며, 잘못한 이에게 피해자를 대신하여 회개를 요구할 수 있으며 이는 자비심이 발현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도 이런 자비심이 발현된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잘못한 이는 얼마든지 용서하셨지만 만인에게 불의를 저지른 자에 대하여는, 위선자에 대하여는 그토록 저주를 하였던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각자의 관용적인 행위이므로 ‘我'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만 자비는 '我'라는 상을 떠나서 하느님께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 모습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행위를 똑같이 한다고 하여도 '나' 라는 상에 집착하여 내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또는 내 이익을 위해서 하는 행위와 자비심에서 비롯된 행위는 다른 것이므로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불의한 위선자에게 일곱 번이나 불행선언(마태 23,13-30)을 하며 저주를 보내는 모습과 '원수를 사랑하라' 는 오늘 여러 말씀과는 모순된 모습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남북경협과 햇볕정책을 퍼주기로 비난했던 자들의 주장은 오늘 복음과는 너무나 다른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오늘 복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이, 특히 개신교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한 모습을 보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교의 현 주소는 복음 말씀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또한 우리는 물론 우리 교회도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파렴치범이 아닌 이상 나와 다르다하여 그 어떤 이유로도 심판하거나 단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삼으며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의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고
불우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할 수 있고
불의한 위선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할 수 있는 마음도 우러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허나 저희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줄도 모르고
불우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할 줄도 모르고
불의한 위선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랑과 자비의 성령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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