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치마를 들춰보고픈 심사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14 조회수656 추천수5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루카 6:43-49)
 
 생각이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생각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내적이고 영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생각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진실 또는 진심(眞心, Reality)”은 생각이나 말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생각이나 말은 “진심”보다 다루기가 쉽다.
생각과 말은 “진심의 거죽”에서 나오는 산물(産物)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나무의 이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유명한 시 <창 앞의 나무>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창 앞의 나무>
       로버트 프로스트
 
내 창 앞에서 선 나무, 창 앞의 나무야!
밤이 오면 난 창틀을 내린다.
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
커튼만은 내리지 말자.
 
땅에서 들어올린 몽롱한 꿈의 머리하며
구름처럼 산만한 것과
네 혀들이 지껄이는 가벼운 소리들이
모두 심각한 말은 아니리라.
 
그러나 나무여, 난 네가 요동치는 걸 보았다.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네가 보았다면
나 역시 절망에 빠져 들썩이고 뒤척이는 걸 보았겠지.
 
운명의 신이 머리를 써서 우리가 머리를 맞대 놓게 한 그날,
외부의 날씨에 마음 쏟는 네 머리와
내부의 날씨에 마음 쏟는 내 머리를 맞대게 하였지.
 
 
진심은 집과 비슷하여 포근하며 말이 별로 필요 없다. 또한 나무의 뿌리와 같이 숨겨져 있으며 조용하고 한결 같다. 이 진심에 생각이 뿌리를 박고 쓰잘데없는 많은 말을 지껄이게 한다. 베드로 같이 성질이 급한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진심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자신의 알량한 생각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고 자신만 믿기 때문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투로 그렇게 행동하기도 한다. 독재자들이 항상 자기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취중(醉中)진담(眞談)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것들이 술의 기운을 빌어 튀어나오는 것이다.
오늘날의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의 행동은 놀랄 만큼 빈 틈이 없어 진실 같이 보인다. 심지어 어린이 조차도 천연덕스럽게 가장된 행동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최근에 한 영화를 보니 배우가 너무나 어설픈 연기를 했다.
연기를 잘 못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서 무척 감동을 받았다.
진실은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들은 “어린애와 동물들과 함께 연기하지 마라.”고 서로에게 충고한다. 그들은 진심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어린애는 진실을 숨기지 못하며 동물은 본심을 전혀 속이지 못한다. 그러나 오락산업 때문에 세상이 온통 바뀌고 있다. 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유스티노프(Peter Ustinov)는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 역을 맡기 위하여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감독은 진짜 같이 보이지 않다고 가짜 수염을 달게 했다.
 
 우리들의 집은 반석 위에 지어져 있지 모래 위에 지어져 있지 않다.
말과 생각과 모습은 모래와 같으며 무한하며 가만히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뀐다. 공백을 잠깐 메워주기도 하지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모래나 말이나 생각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모래는 수십억 개의 작은 바위로 되어 있어 응집력이 없어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한다.
[言]만 앞세우고 사는 인생은 변화무상하며 바람에 날리고 쉽게 흔들린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다.
게으르거나 표면에 만족하지 맙시다. 바위를 발견할 때까지 더욱 더 깊이 팝시다.
바위가 곧 그리스도셨습니다.’”(1코린 10:4)
 
<치마를 들춰 보고픈 심사>
後考
 
아이가 엄마의 치마를 들춰 치마 속으로 숨는다.
태어난 곳으로 찾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엉큼한 인간의 본색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아야 진실을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불신은 끝없이 다른 불신을 만들고 불신의 감옥에 사람들을 가두고 있다.
허상을 보고 있는 자신을 모른 채 자기 안으로 계속 숨어 든다.
 
그 감옥에는 가계의 전통도 숨어 있다.
마치 정신적인 암 같이 좋지 않은 전통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세습되고 있다.
그리하여 폐암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암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남을 무시하도록 만든다. 
화려한 과거가 더욱더 자존심을 부추겨서
심연(深淵)으로 빨아 들인다.
어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다.
 
주님, 왜 진리를 그렇게 꽁꽁 숨겨두셨나이까?
주님, 왜 가까이에 있는 진리를 먼데서 찾도록 만드셨나이까?
주님, 왜 겉과 속을 다르게 만드셨나이까?
주님, 왜 얼굴에 가면을 쓰고 다니게 만드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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