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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15 조회수423 추천수3 반대(0) 신고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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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영보로부터 오순절까지 마리아는 기다리고, 생각하고, 고통당하고 신뢰하였습니다. 마리아가 품위와 자부심 속에서 출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없었던 마을에서 예수는 태어났습니다. 그들 자신의 단순한 믿음이라는 불분명함속에서 양치기들과 비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였습니다. 양치기들과 점성가들은 사람들에게 물으면서 그 초라한 아기와 부모에게 예배하기 위해서 모두 단순하게 온 반면에, 살인자들과 정치가들과 그 밖의 다른 협잡꾼들은 마리아와 요셉을 에집트로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세계의 중요한 고속도로 중의 하나가 지나가는 마을 나자렛에서 단촐한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마리아는 돌아오게 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할례식을 받고 부모에 의해 성전에 바쳐졌습니다. 언제나 신앙에 전념하면서 그들은 율법을 준수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역이 되는 다른 두 장면은 그 깊이에 있어서 너무나 두드러지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교훈들을 간과하게 됩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성전의 랍비들과 토론하기 위하여 소년은 부모의 순례단과 떨어져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어리둥절해진 겸허한 이 부부는 근심에 싸여 그를 찾습니다. 그들이 그를 찾아 자연스런 부모의 고민에서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이것을 알아 듣지 못하였으나 마리아는 다시 이 모든 것을 기억에 간직하고 마음 속으로 늘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요한에 의해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강하게 말하면서도 그의 어머니가 바라는 것을 해 줄려고 합니다.


십자가에 내맡기는 마리아

마리아가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다른 장면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미쳤다고 비난받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의 어떤 기적을 보고 한 여인이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하고 소리칩니다. 마리아에게는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지 다만 알지도 못할 때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신뢰하고 마음을 열어 놓도록 끊임없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일생은 진정 받아들이고 내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결합하여 자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내맡긴 곳은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 보는 십자가의 발 아래였습니다. 거기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과 마리아 자신의 부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예비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마리아는 그때부터 요한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을 듣게 되고, 요한복음의 상징적인 특징으로부터 예수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는 교회와 또 우리 각자와의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마리아에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신심, 주님께 직접 제시해 주신 신심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변호자 마리아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에게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마리아가 사도들을 예루살렘에서 다락방에 모으고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던 오순절 이후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마리아 자신은 기도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기다리며, 귀기울이고, 하느님 안에서 살려는 기도는 그녀의 믿음과 같이 그녀의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에 접근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마리아와 암암리에 친밀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 하느님께의 끊임없는 내어맡김, 본질적인 인간, 매우 친밀하게 우리 각자에게 와 닿는 삶 속의 사명, 이런 것들은 마리아가 우리의 모방과 신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영혼을 알게 된다는 것은 관조적이며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교회에 대체로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기만 한다면 듣고, 기다리며, 염려하고, 생각하는 마리아의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마리아와의 활기찬 접촉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과 사명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생활 형태에 동화하고 마리아의 자질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매일의 도움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하느님의 변호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마리아

칼 융(Carl Jung)은 마리아처럼 같이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항상 열려 있기 위하여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여성적인" 수용성의 감각을 얼마나 많이 계발할 필요가 있는지를 상기시켰습니다. 잘 알려진 그의 "욥에 대한 대답"에서 융은 개신교가 마리아를 거부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사라짐과 더불어 여성의 원형적인 상징과 그 안에 감추어져 잇는 위탁과 수용의 의미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들 서구인들은 게오르크 말로니가 언급했듯이 기술에 있어서는 높은 수준에 있으나 직관에 있어서는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 즉 매우 분석적이지만, 종합적이지는 못합니다. 융에 의하면, 수학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은 신화와 상징에 의해서 우리는 절대자와 친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을 맺고 우리의 모든 능력을 완전하게 하며, 우리의 인생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깊게 하고, 그리스도가 부르고 마리아가 손짓하는 매일의 영혼의 회개에로 우리를 이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만나기를 우리는 갈망합니다.


결론

성모와의 심층적인 관계는 조만간 우리의 마음을 뚫고 들어와 마음을 정화시키고 성자의 신비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게 할 것
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의 본보기를 따르면서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신심을 결정적으로 부흥시키고 현대화하는데 착수해야만 합니다. 묵주의 기도, 매월 첫 토요일 성모의 날에 성모께 바치는 기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마리아께 바치는 기도, 여러가지 이름으로 마리아께 바치는 다양한 신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어느 정도 사적인 개인기도 등이 현대적인 의미로 갱신되고 활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환상에 사로잡혀 다른 신심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재교육시키고,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 우리의 선조들의 그칠 줄 모르고 바쳐 왔던 다음의 기도를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시어 그리스도의 언약하신 바를 얻게 하소서."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중에서 /
죤 V. 세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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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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