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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중 속의 교회' - '교묘한 세속주의' [미사(성찬례) 경시]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16 조회수324 추천수2 반대(0) 신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묘한 세속주의'가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특별히 이러한 세속주의적 사고방식은 형식적이고 공허한 성찬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교황은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서조차 교묘한 세속주의의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러한 세속주의적 경향은 성체성사를 단지 하나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의식으로 전락하게 만든다"며 "이처럼 형식적인 전례전례에 대한 깊은 공경과 존경심을 통해 표현되는 진실한 참여를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혹은 매우 강력해서 기도를 피상적이고 성급하게 치르는 형식적인 절차로 만들어버리고 지상의 활동과 걱정들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게 한다"고 덧붙였다. "성찬례는 오늘날 거룩한 미사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세상의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면서 "따라서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첫 걸음은 바로 우리들 안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성체성사 안에서 천국은 지상으로 내려오고 하느님의 미래는 오늘날의 세상으로 다가온다"며 "그것은 마치 시간이 하느님의 영원 안에 머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 뉴스 홈, 교황청 >

 

 


새로운 세상의 첫 걸음은 인간 안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미래(새로운 세상)는 우리들 밖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들 안에 있다. 자기 밖에서 인간을 찾는 사람은 인간을 찾는게 아니라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 밖에서 인간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을 잃게 한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저버린다는 의미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기 밖에 있는게 아니며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상은 자기 안에 있는 인간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 밖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안에 있는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안에 있다. 세속주의는 자기 안에 있는 인간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밖에 있는 인간(곧, 자신)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없는' '교묘한 세속주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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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일반알현 강론말씀

 

* 2009. 1. 7 바오로 6세 강당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2009년도의 첫 일반 알현에서,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제 막 시작된 새해의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정신과 마음을 열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을 새로이 하여 그분의 참된 벗들이 되고, 벗들로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동행하심으로써, 올 한해는 피할 수 없는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찬 길이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하나되어 있을 때에만 새해는 선하고 행복한 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고자 하는 노력은 성 바오로도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입니다. 그분께 바치는 이 교리교육을 따라가면서, 오늘 우리는 그분의 생각 중 중요한 한 가지를 짚어보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도의 반 예배적인 경향, 곧 예배라는 개념을 “영적으로 여기는 것”에 관해 즐겨 말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예배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변모시키고 쇄신하는 역사적 반전을 보았음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로마서의 텍스트 세 곳에서 예배에 관한 이 새로운 시각이 나타납니다.

1) 로마서 3장 2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에 관해 말한 다음,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뭇 신비로운 형태로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속죄의 도구”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 표현을 통해, 성 바오로는 구약에서 “속죄판”이라 불리던, 계약의 궤를 덮는 덮개에 관해 언급하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접촉점이었고,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이 신비롭게 현존하시는 부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속죄판”에는 위대한 화해의 날인 “욤 키푸르”에 속죄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피가 부어졌습니다. 그 피는 상징적으로 한 해의 죄가 하느님과 접촉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선하심이라는 심연 속으로 던져진 죄는, 하느님의 힘으로 흡수되고, 극복되며, 용서받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 예식을 언급하면서 말합니다. “이 예식은 우리의 죄가 하느님 자비의 심연 속으로 내 던져져서 사라지게 하고 싶은 우리들의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는 이 과정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사랑 사이에 더 진정한 만남이 필요했습니다. 이 만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 되심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바로 인간의 비참함과 하느님 자비 사이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분의 마음 안에서 인류가 저지른 악의 슬픈 응어리가 풀렸으며, 생명이 새로워졌습니다.

이런 변화를 부각시키며,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된 하느님 사랑의 최고 행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을 제물로 바치던 옛 예배는 끝이 났습니다.” 이 상징적이고, 소원을 담은 예배는 이제 참된 예배로 대체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육화되고,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사랑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된 예배를 영적으로 여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이고 한시적인 예배를 대체하는, 신적이며 인간적인 참된 사랑의, 참된 예배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현실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살과 피가 참된 예배입니다. 성전의 외적인 파괴가 있기 전에, 바오로에게는 성전과 그 안에서 행해지던 예배가 이미 끝났습니다. 바오로는 따라서 이 부분에서 성전의 종말과 더불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 곧, 부활하신 당신의 몸인 성전(참조 마르 14,58; 요한 2,19이하)에 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완전히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 텍스트입니다.

2)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다른 텍스트는 로마서 12장 첫 부분에 있습니다. 이미 들은 말씀이지만 다시 반복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 하나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설명됩니다. 제물은 속죄양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만,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연관지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바치십시오”라는 표현은 그 다음 이어지는 제물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봉헌하는 것, 바치는 것”의 예배적 뉘앙스를 지닙니다. “몸을 바치라”는 권고는 사람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6장 13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을 바치라”고 초대합니다. 그 나머지는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1코린 6,20)라는 초대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육신적 차원에 정확히 귀결됩니다. 즉 이성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더 구체적인 일상의 존재 속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태도는 바오로에게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여겨졌습니다. “제물”이라는 어휘를 만나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일상 용법으로 이 단어는 동물을 잡아서 한 부분은 신들을 흠숭하며 불태우고, 다른 부분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먹는 것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신성한 예식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합니다. 실제로 그는 형용사 세 개를 써서 그런 제물을 규정합니다. 첫째, 생기를 표현하는 “산”이라는 단어입니다. 둘째는 바오로가 지녔던 장소나 물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인격 자체에 관한 거룩함을 상기시키는 “거룩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셋째는 제물에 관해 성경이 흔히 표현하는 “향기로운” (참조 레위 1,13.17; 23,18; 26,21; 등)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이라는 단어입니다.

곧 이어서, 바오로는 이 새로운 사람의 방식을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영적인 예배입니다.” 성서학자들은 그리스어 표현 “ten logiken latreian, 텐 로지켄 라트레이안”이라는 표현이 번역하기 쉽지 않음을 잘 압니다. 라틴어 성경은 “rationabile obsequium 라시오나빌레 옵세퀴움”이라고 번역합니다. 같은 단어 “rationabile 라시오나빌레”가 로마미사경문 성찬기도 제1양식에 “하느님께서 이 예물을 ‘합당하게’ 받아주시도록 기도합시다”라는 부분에 나옵니다. 이탈리아어 번역인 “영적인 예물”은 그리스어 텍스트(와 라틴어 텍스트)의 뉘앙스를 잘 반영하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덜 현실적인 예배 혹은 나아가 은유적인 예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예배를 뜻하는 것이지요. 이성을 지닌 존재인 사람의 전부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영광을 드리는 그런 예배를 말합니다.

로마 경문의 성찬기도에 쓰여지는 이런 바오로적 형태는 그리스도 이전 수 세기 동안 발전된 종교적 체험의 결과입니다. 그런 체험 안에서 구약의 신학적 발전과 그리스 사상계의 흐름이 만납니다. 저는 이런 발전의 몇 가지 요소 만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예언서들과 여러 시편들은 성전에서 드리던 피 흘리는 번제를 강력히 비난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50편에서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누리와 그를 채운 것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고 숫염소의 피를 마시기라도 한단 말이냐? 하느님께 찬양의 제물을 바쳐라…”(12-14) 그리고 다음 시편 51편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18) 다니엘서에서는 헬레니즘 정권이 성전을 다시 파괴하던 때에(기원전 2세기경) 같은 방향을 지닌 새로운 구절을 발견합니다. 불길 한 가운데서, 곧 박해와 고통 가운데서, 아자르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다니 3,38이하) 성소와 예배의 파괴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의 모든 표지가 제거된 이런 상황에서, 믿는 이는 참된 제물로 자신의 부서진 마음을, 곧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바칩니다.

아주 중요하고 아름답지만 위험스럽기도 한 하나의 발전을 우리는 봅니다. 그것은 예배를 영적인 일로 여기고 윤리도덕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예배가 순전히 마음과 영혼의 것이 되고 맙니다. 거기엔 몸이 없고, 공동체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편 51편과 다니엘서가 예배를 비판하면서도 번제를 바치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까지는 예견할 수 없었던, 아직 생각할 수 없었던 하나의 요약 속에서, 쇄신된 시간이고 쇄신된 번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에게 돌아갑시다. 그분은 사람이 몸소 하느님의 영광이 되고, 자신의 존재 전체로 살아있는 흠숭이 되는 살아있는 예배를 소원하는 이런 발전과정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분은 로마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바오로는 3장에서 이미 가리켰던 부분을 되풀이합니다. 동물들을 대신 잡아 바치는 번제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참된 예배의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예배를 윤리도덕적인 의미로 쉽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우리가 참된 예배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하면 동물로 바치는 예배가 윤리도덕으로 대체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윤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스스로 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 바오로의 의도가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합당한 영적 예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바오로는 항상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다”(갈라 3,28)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세례 속에서 우리가 죽어서(참조 로마 1)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됨 안에서, 이렇게만,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산 제물”이 될 수 있으며,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동물을 바치는 번제는 사람을, 사람이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을 대체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우리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하나의 대체가 아니라, 참으로 자신 안에 인간 존재를 우리의 죄와 우리 소망을 지니고 가십니다. 참으로 우리를 대표하며, 자신 안에 우리들을 담으십니다. 믿음과 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친교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온갖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산 제물이 되며, “참된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집약이 영적인 예배를 실현하기에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로마 미사경문의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거룩한 성찬례 안에서, 그분의 참된 희생이 현존하게 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변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들의 힘으로는 될 수 없지만,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모든 것을 신국론 제10권에서 멋진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두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이다.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 “성인들의 모임이며 사회인, 구속된 공동체 전체(civitas)는 자신을 내어주신 대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쳐진다.”(10,6; CCL 47,27ss)

3) 마지막으로 새로운 예배를 언급하는 로마서 셋째 텍스트의 짧은 구절을 보겠습니다. 성 바오로는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hierourgein)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15,15s) 바오로 서간들에서 유일한 어휘인 참으로 멋진 이 텍스트에서 꼭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성 바오로는 보편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세상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수행하는 그의 선교직을 사제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친교 안에서 민족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복음 선포가 하나의 “사제적”활동입니다. 복음의 사도는 참된 사제로써, 사제직의 중심이 되는 일, 곧 참된 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합니다. 두 번째로는 선교 활동의 목적은 전세계적인 전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민족들, 곧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 자체가 되며,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여기서 예배의 바오로적 개념 속에 희망을 주는 역동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심은 모든 사람을 그분의 몸과 친교를 이루도록 매혹시키는, 세상을 하나가 되게하는 경향을 포함합니다.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신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만, 하느님과 함께일 때만, 세상은 우리 모두가 소원하는 대로, 하느님 사랑의 거울이 됩니다. 이 역동성은 언제나 성찬례 속에 존재합니다. 이 역동성이 우리 삶에 영감을 주고 틀을 잡아야 합니다. 이 역동성과 더불어 우리도 새해를 시작합시다. 여러분의 인내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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