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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께 대한 흠숭 / [복음과 묵상]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20 조회수386 추천수1 반대(0) 신고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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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께 대한 흠숭
(한스 부오프 신부)


나는 언젠가 한 신학교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하느님께 흠숭드리는 성체조배' 에 대해 강론을 많이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학생들이 처음 입학했을 때는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성체조배를 자주 하지만 이내 가끔씩 하다가 결국은 아예 그만 둔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성체조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성체조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교회 역사상 모든 영적 쇄신 뒤에는 "성체조배"가 있었다. 오늘날 성체조배를 드리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
조배는 아주 단순한 말로 표현된다. 즉 "하느님, 당신이 전부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심을,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근원이심을,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실재의 근원이심을 완전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체조배는 우리 자신의 완전한 종속을 의미한다. 여기에 흠숭과 조배에 대한 기본 마음가짐이 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올바르게 흠숭할 수 없으며 중재를 바라는 어떤 기도도 드릴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의 청원으로 불러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감사드리거나 찬양할 수도 없다. 기도의 모든 형태, 다시 말해 믿음의 모든 형태는 흠숭에서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열심한 신심 단체들을 제외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성체조배를 드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흠숭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은 역사하실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조배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로지 당신을 완전히 흠숭하는 곳에서만 활동하실 수 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영적 생명이 점점 더 쇠락해 가는 것을 막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시 깨우치고 고백해야 한다. "하느님, 당신만이 전부이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모든 것은 오로지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제 모든 것은 오로지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제 모든 존재는 오로지 당신의 선물입니다!"

성체조배는 무한한 자유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변호해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은 주님이시고 저는 당신의 완전한 피조물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 그 고백을 하자마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노골적인 저항이 일어남을 느낀다. 곧 그들은 "완전하리라고? 나도 잘 생각해보면 제법 중요한 존재야!" 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중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저항은 인간 죄의 원천인 우리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교만은 사람이 죽은 다음 15분이 지나야 비로소 죽는다." 또 아빌리의 성녀 데레사의 영적 지도자 중의 한 분이었던 프란치스코 데 오수나(Francesco de Osuna)는 이렇게 썼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믿는 자는 정반대로 오만한 자이다."

겸손은 진리에 대한 용기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오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식하는 용기이다. 우리가 교만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어떤 경우에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 진리를 참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겸손이며 하느님을 진정으로 흠숭하는 자세이다.

('Anbeten mit Maria, 2000' 에서)




[9월 21일] 생명의 말씀 '복음'  
<마태오 9,9-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9월 21일,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파격입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과 동일시되던 신분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시어 ‘당신 사업’을 맡기려 하십니다. 사람들이 따라 줄까 하는 것은 염두에 없으십니다. 사람을 보시는 눈이 세상 시각과는 확연히 다르십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이거나,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들을 변화시켜, 초대 교회의 뛰어난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축복입니다. 어부와 세리를 ‘영적 지도자’로 만드신 분께서는 지금도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롭게 따르기만을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빛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빛의 생활이 그분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둠의 자식’이라 일컫던 마태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직업을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고 삶을 대하는 자세를 보셨습니다. 마태오를 닮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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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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