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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행동, 인간능력, 자력의화 [십자가 죽음을 불렀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22 조회수372 추천수1 반대(0) 신고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가난의 여정 , 사랑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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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구원행동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 안에서 이루어진다. 케쓸러는 "예수님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말씀)와 활동(행적)을 통해서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현존케 하는데에 전념하였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느님을 이렇게 체험하고 그 결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구원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실천은 '여기저기서 인간 행동과 인간 능력, 자력 의화 안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예수의 하느님을 의문시하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부류의 반목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안겨 주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하늘 나라 선포와 실천을 의문에 처하게 했지만 부활을 통해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예수 부활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이며 그를 믿고, 그의 복음에 몸 바치며 예수의 십자가 삶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전통적인 구원론과 구별된다. 예수님의 삶과 활동에로 초점을 두면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구원관'은 '전통적인 구원관'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라이문트 슈바거는 이런 문제를 분명하게 의식하고서는 두가지 구원론의 조화를 시도한다. 그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실천)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십자가 중심의 구원론'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였다.

 

제1막 :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중심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죄인들과 세리들을 사랑으로 만나고 용서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구원을 제시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과 회개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회개가 용서보다 선행하는 것이지만 이제는 은총에서 회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없지만 뒤따르는 조건은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코 1, 5) -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는 곧바로 회개의 요구로 이어진다. 이 회개의 기본적인 형태는 아버지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인데 이는 산상수훈에서 드러난다.

슈바거에 따르면, 회개는 예수님의 '하느님의 다스림' 선포가 지향하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산상수훈 (행복선언)에서 요구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면 새로운 백성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단지 일방적인 용서와 무조건적인 구원의 제안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회개와 응답의 요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이스라엘의 지배층으로부터 심각한 반대를 받았으며 마침내는 거부되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구원 드라마 2막을 이룬다.  

제2막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받아들여 회개해야 했지만 거부하고 말았다. 이 거절로 인해 새로운 상황이 형성되었다. 계시를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이 거부하였고, 이 거부의 상황에서 예수는 심판의 말씀으로 응답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제안을 거부한 것에 대한 귀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예수가 선포한 심판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정한 척도에 따라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같 어둠 속'(마태오 25, 30)으로 쫓겨난다.

제3막 : 심판을 선포하신 예수 자신이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악이 배가(倍加)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수용할 자세를 갖출 정도까지 자신의 사랑을 고양(高揚)시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하늘의 아버지께 용서를 얻기 위한 보상의 실천이 아니라,  '아버지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속죄한 행동이었다.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해 이 요구를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이런 완전성을 닮아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하느님의 다스림' (사랑의 정의)을 실현한 것이다.

제4막 : 부활 사건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아니라 예수가 옳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판결이다. 하지만 슈바거는 부활 사건이 단지 예수가 옳고 그의 반대자들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을 위한 사건임을 강조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판결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반대자들을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바친 아들을 위한 결정이다. 그러므로 이 판결은 좀더 깊이 본다면, 죄인들을 위한 결정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여 '자기 심판'의 운명에 놓였던 죄인들을 대신해서 행동하였고, 하느님은 이들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하느님은 위기의 순간에 나약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자를 저버린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라는 메시지와 함께 부활한 예수를 돌려보냈다.

이는 “단지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추인만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 즉 진정한 용서의 제안을 거부하고 아들을 배척한 이들에 대한 용서를 포함한다. 부활의 평화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 메시지에서 선포되었던 용서의 준비가 배가(倍加)되었고, 처음에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위한 용서가 이루어졌다.”

부활 사건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은 완고하게 아들을 반대하고 죽였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구원을 제시함으로써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 주인과는 달리 행동하였다. 즉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드러낸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완고함 앞에서도 취소되지 않고 오히려 배가(倍加)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5막 : 성령 강림을 예수 부활 이후의 시간과 구분되는 사건으로 보면서, 성령 강림 사건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제자들은 성령 강림 이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 없이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한 예수를 메시아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바로 성령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 체험은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내면에 이르러서 새로운 확신을 만들어 주어 세상과의 대결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성령의 시간은 각자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성령 체험에 기인한 용기의 시간으로서 예수의 시간과 분명히 구분된다. 성령은 인간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하는 능력을 지녔고, 이 능력을 통해서 제자들은 비로소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예수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성령 강림 후에 형성된 신앙인의 공동체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언어적, 대립의 극복을 목표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의 소집은 처음에는 인간들의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더 나아가서 반대의 소집, 하느님의 아들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세력들의 규합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그[예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부활 이후의 새로운 소집―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성령―은 이런 헌신에 대한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맺는말
 
슈바거는 드라마의 모델을 빌려 예수의 생애를 5단계로 구분하면서 구원론을 전개한다. 그는 우선 하느님의 구원 행동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실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이런 하느님을 닮은 행동을 할 때 구원 공동체인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예수와 그의 선포를 거부하여, 예수가 심판의 말씀을 통해서 밝혀 준 바와 같이 인간 자신들의 자기 심판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속죄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에 기반을 둔 조건 없는 하느님의 용서를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 메시지를 마땅히 받아들여야 했으나 이를 거부함으로써 자기 심판의 위기에 처한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였던 이들에게 재차 구원을 제시하였고,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함께 시작하였지만 인간의 거부로 말미암아 실패했던 구원 공동체인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소집이 성령의 파견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 신학과 사상 48호 자료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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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막 : '죽은 행동'은 '말씀(하느님의 진리)대로 행동'하는 순수한 행동(실천)이 아니라, 인간 자신들이 세상을 보고 만들어 낸 '인간의 진리'(이념사상)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생명'은 '인간의 진리'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참된 생명은 '인간의 진리'를 극복하고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느님의 다스림)하고자 하려는 순종의지가 드러나는 '살아있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살아있는 행동'으로 믿음의 실천을 '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진리'에서 '하느님은 없고' 진리만을 떼어 가져가서는 변질된 '인간의 진리'인 이념들을 만들어 내면 미움과 분열과 상처로 그 이념들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없다면 인간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들이 산상수훈(행복선언)에서 요구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면(죽은 행동이 아닌, 살아있는 행동) 새로운 백성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비록 가진 것이 없는 힘없는 약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실천한다면(가난한 과부의 비유 - 완전한 가난)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말씀의 성령에 의해 사람들 가운데에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반대자들을 용서하면서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평화와 생명을 갈망하는 것(사랑의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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