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6 주일 - 죄를 끊어버립니까?
우리는 세례 때 “죄를 끊어버립니까?”라는 사제의 질문에 “예! 끊어버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례를 받고 죄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보거나 아예 고해성사 보기가 싫어서 죄인으로 남아있기를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중독성 때문일 것이고 또 고해성사라는 탈출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술을 여러 번 끊어보려고 했습니다. 한 번 결심을 하면 1년 내외 정도는 끊었다가 또 어떤 계기로 해서 다시 시작하곤 합니다.
술을 끊게 되는 이유는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다닐 때는 절제 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한 번은 동아리 모임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필름이 끊겼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전 날 일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방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있지 않은 나체로 누워있는 겁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선배 형이 술을 먹고 눈을 떠 보았는데 사창가였고 그렇게 기억도 없이 순결을 잃었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가슴이 철렁 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방은 동아리 친구의 집이었고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관이었습니다. 제가 지하철에서 한 여자 동기의 옷에 오바이트를 해서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고 저는 토한 오물 위에 주저앉는 바람에 옷을 다 벼려서 집까지 데려와 옷을 벗기고 재웠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다정스럽게 그 어머니가 해 놓고 간 해장국을 내어주었지만 저는 그 해장국을 보자 다시 구토가 나려고 해서 아침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걱정할 것 같아 옷을 빌려 입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에서도 다시 울렁거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려 하였습니다. 이를 꽉 깨물었더니 물만 떨어졌고 건더기는 다시 꿀꺽 삼켰습니다. 그 모양새를 본 사람들이 저의 곁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한 달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고 실수 할 때마다 술을 끊겠다고 매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콜라만 마시고 있을 수 없어서, 또 사제가 되어서는 사목적인 핑계로 다시 시작하고 또 끊고 다시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8개월 끊었다가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이젠 한 10년 동안 마시지 않던 소주까지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술을 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엔 술을 마시되 후회할 일을 할 때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되어가니 술은 오히려 좋은 면도 많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끊었다가도 그 좋은 면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담배는 피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호기심으로 한 갑 정도를 피워보긴 했지만 그 이후로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왜 담배를 피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술에 비해서 담배는 백해무익하다는 말을 하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또 아버지를 포함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 현재 담배를 끊기 위해 기를 쓰고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백해무익한 것을 시작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 들어갔을 때 큰 위기가 왔었습니다. 자대에 처음 배치되어 일병 주임이 이것저것 알려주면서 담배를 한 대 권하였습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운다고 거절하였는데 그 선배는 기분이 나빴는지 한 달 내로 담배를 피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눈을 뜰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군대용어로 말하자면 저를 갈궜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담배피우기를 거부하였고 그 선임은 제대하는 날까지 저를 괴롭혔었습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제대하고도 담배를 다시 피울 일은 없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일순간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술처럼, 한 번 시작하면 끊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울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저에게 담배일까요, 술일까요? 담배도 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는 담배처럼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술처럼 끊었다고 마셨다가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죄를 완전히 끊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이 죄를 짓거든 눈을 파 버리고 팔이 죄를 짓거든 팔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굳은 결심으로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남을 죄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만약 오늘 복음 말씀처럼 그대로 실행한다면 사지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죄를 반복하게 되는 이유가 그 백해무익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작은 거짓말이라도 한 번 하느니 천 번 죽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작은 거짓말이라도 그 결과가 얼마나 안 좋은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농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농약을 그냥 한 번 마셔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끊기 위해서는 그 죄의 백해무익함을 절실하게 깨닫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요?
바로 성령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열매가 시들어버립니다. 즉,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기쁨이 우울함으로, 평화가 초조함이나 두려움으로 바뀌고 자기 절제가 되지 않아 계속 그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한 마디로 행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묵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인은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의 결과들은 고해성사를 하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죄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짓는 죄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만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가끔 연세 드신 자매님들이 이야기 하는 중에 예전에 남편이 바람피웠던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그것이 용서가 아직도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만약 한 번 외도를 하는 것이 평생 그렇게 커다란 상처를 남에게 주고 또 그 상처로 인해서 평생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안다면 어떻게 바람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말로는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들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상처를 계속 지니고 계셨던 것처럼 부활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며 영원히 우리의 죄를 되새기며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그리스도께 더 감사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기는 하겠지만 또한 그렇게 고통을 드리는 줄 알면서도 죄를 반복했다는 죄책감은 마치 베드로가 닭이 울 때마다 눈물을 흘려 얼굴에 눈물 골이 파였다고 하듯이 우리를 영원히 슬프게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바람을 피우고 용서를 받아서 함께 사는 것보다 처음에 했던 서약을 깨지 않고 온전히 지켜 끝까지 완전한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내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마치 거저 얻는 무엇인양 가볍게 여기고 죄를 반복한다면 무한하신 그리스도도 용서를 청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수난공로를 나누어주시기는 하시겠지만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그 분이 마음아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죄에 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에 대한 인식을 다시 가지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눈을 뽑고 손발을 자를 정도의 결심을 하고 고해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면 또 범할 죄를 고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자비를 비웃는 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를 남용하지 맙시다. 올바른 성찰이란 정말 앞으로는 그런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까지 봉헌하고 나서야 완성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