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9.27 연중 제26주일
민수11,25-29 야고5,1-6 마르9,36-43.45.47-48
"자유롭고 행복한 삶"
사람 누구나 추구하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얼마 전 의미 깊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가 크든 작든 받아들이고 있는
글로벌자본주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독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부탄과 쿠바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이 두 나라를 방문한 글쓴이의 묘사입니다.
‘부탄이나 쿠바도 가난하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을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도 모두 밝았다.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인사를 해 준다.
이른바 거지도 만나지 못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부탄은
인구 60만 명이 조금 넘고 면적은 4만7천제곱킬로미터인
그것도 거의 고산지대의 소국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감은 현실의 영토나 경제력을 훨씬 능가한다 합니다.
부탄의 기초를 놓은 1972년 당시 국왕은
‘국민의 행복은 결코 경제발전으로 측량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국민총생산(GDP)의 추구보다는
국민총행복량(GNH, Gross National Happiness)의 향상을 지향한다는
국가이념을 내걸었고,
그 방침을 다수의 국민이 지지했기에,
외견상 일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의 세계 122위의 가난한 나라지만
내적으로는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국민총생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국민총행복량이 중요합니다.
과연 우리나라의, 내 자신의 국민총행복량은 얼마나 될까요?
국민총생산량과 국민총행복량이 함께 가는 게 아닙니다.
많이 소유했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은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죄를 짓지 마십시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위한 첫째 조건입니다.
인간 누구나 선천적 양심이 있기에 죄를 짓고서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위장해서 감쪽같이 살 수 있어도
하느님은, 내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죄책감으로 무뎌진 양심으로 살다보면
자유와 행복은커녕 안으로 서서히 무너져갈 뿐입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 앞에,
사람 앞에,
내 자신 앞에 떳떳해야 자유요 행복입니다.
이래서 주님도 죄를 단호히 끊어버리라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 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리고,
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 역시 잘라버리고,
또 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합니다.
성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불구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낫다 하십니다.
모두 극단의 충격적 처방입니다.
그토록 죄를 두려워하여
사람을 망가뜨리는 일체의 죄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죄를 지라고 있는 손이 아니라
기도하고 일하라 있는 손이요,
죄 지라고 있는 발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도우라 있는 발이요,
죄를 지라고 있는 눈이 아니라
하느님과 세상의 진선미(眞善美)를 보라고 있는 눈이 아닙니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죄도 점점 커져가고 이웃에 전염되어
걷잡을 수 없이 사회를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혼의 암, 사회의 암과 같은 죄입니다.
이래서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 죄인들을 위해
교회에 고백성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십시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날로 씀씀이가 헤퍼지는 추세입니다.
작게 살고 적게 쓰는 자발적 가난의 단순하고 검소한 삶만이 살길입니다.
반대로 크게 살고 많이 쓰는 탐욕과 낭비의 삶에서
날로 좁아지는 공간에 늘어나는 쓰레기에 오염과 공해가 아닙니까?
야고보 사도의 열화와 같은 말씀입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 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심판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날로 커지는 양극화 시대의 오늘 날
부자들에게 경종이 되는 예언자와도 같은 사도 야고보의 말씀입니다.
자기를 사는 게 아니라
십중팔구 탐욕의 환상 곳에 거짓 나를 살기 쉬운 게 바로 부자들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소유의 양에 있는 게 아니라,
자발적 가난의 단순하고 검소한 삶에 있습니다.
이래야 죄도 덜 짓습니다.
자발적 가난의 삶은 돈을 맨 위에 놓은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맨 위에 놓는 삶입니다. 주
님께서 하늘나라 대헌장인 진복선언의 1조가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둔 이들이
진정 마음이 가난한 겸손한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고
진정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둘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무욕의 초연한 삶이요 자발적 가난의 본질적 삶입니다.
이렇게 살 때 말 그대로 작게 살고 적게 써도 행복하고 넉넉한 삶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잊고
일과 소유의 종이 되어
돈에 중독이 되어
죄에 오염되어 완전히 환상 속의 삶을 삽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이들 얼마나 되겠는지요.
영혼을 잃어버린 세상, 방송, 신문, 교육, 공무원,
… 온통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 같습니다.
하느님을, 마음의 가난을 잃어버린 업보입니다.
세상을 얻은 들 자기를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제 분수를 알아
어느 정도의 의식주에 자족하며 사는 이들이
진정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나누며 사십시오.
독점이 죄입니다.
참으로 집요한 소유욕이요 독점욕입니다.
이런 욕심에 매여 사는 한 자유와 행복은 요원합니다.
끊임없이 나누며 사는 삶입니다.
사랑도, 희망도, 믿음도, 밥도, 기쁨도, 슬픔도 나누며 살 때
삶의 의미도, 삶의 의욕도 살아납니다.
부지든 가난한 자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나눌 것 없어 못 나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존재의 나눔이란 말도 있듯이
가난해도 착하게 사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맑고 향기로운 나눔입니다.
온 세상의 자연 만물도 하느님을 닮아 다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논밭의 온갖 작물들은 우리에게 과일과 곡식 열매를 나눠줘 살게 합니다.
하여 서로 나누고 살라고 공동체입니다.
나누지 않아도 혼자 자족하며 살 수 있는 부자들도
구원 받기 위하여 이런 나눔 공동체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바로 교회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경계가 제한이 없는 분이십니다.
모두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의 처신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여호수아의 편협한 독점욕을 질타하는, 하느님만큼이나 관대한 모세입니다.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들 외에도
진영 밖에 있는 두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영을 나눠주신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막지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당신의 권능을 독점하려는 제자들의 잘못된 열성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하느님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면
누가 내 능력을 도용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참 바다같이 넓고 대범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태양 그 자체가 빛과 열의 나눔이듯 하느님 그 자체가 나눔입니다.
하느님의 끊임없는 무상의 나눔으로 생명 받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비록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라도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활로를 찾아야 합니다.
가능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이게 자유롭고 행복한 본질적 삶의 첩경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