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들 가정에 도사리고 있는 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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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09-09-27 | 조회수655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기 11:27-29)
모건(G.W. Morgan)은 그의 책 『Prophetic Voices』에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경쟁을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이 경쟁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하며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이겨야 한다는 기본적인 마음 가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사업에서도 그러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한 것 같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모세의 시종이 다른 예언자들이 나서는 것을 고자질했을 때 오히려 모세는 그의 시기심을 나무랐다. 모세는 시기심이라 표현했지만 이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편가르기 심사이다. 편가르기를 하기 시작하면 내 편이 아니면 중립적인 사람이나 다른 편 사람들이 모두 적(敵)이 된다. 전 영국 수상 대처가 말한 대로 오늘날에는 사회는 없고 가족만 있다. 사회는 없고 가족끼리 편싸움을 하고 있는 아수라장만 있다.
또 한 가정 내에서는 친정 편이 있고 시집 편이 있다.
추리소설에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극적인 반전(反轉, twist ending; surprise ending)”이 있다. 오 헨리(O. Henry)의 작품은 극적인 반전으로 유명하다. 그의 한 작품에서는 사랑에 굶주린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녀는 언제나 아버지의 무릎에 앉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때마다 “나가서 놀아라.”고 말했다. 소녀가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다. 마침내 소녀는 창녀가 되었다. 그녀가 죽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고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오면 하늘나라로 따뜻하게 맞아 들이되 그녀의 아버지가 오면 그의 인생을 책임지게 하시오.”하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는 마치 백지 같아서 거기에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부모의 의도에 따라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이 다르고, 그 아이 또한 부모에게 배운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요구가 자신에게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부모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랬다고 하더라도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어떤 부모든 가끔씩 부족한 면을 드러내게 마련이고, 아이에게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려고 들면서 끊임없이 아이들 위에 군림하거나 아이들을 꺾지 못하여 방임(放任)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해를 끼친다.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는 유독성 화학물질과 같이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침투해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 고통을 주고, 그 아이가 부모가 되면 2세에게 다시 상처를 입힌다. 특히 신체적인 학대는 너무나 큰 상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무시무시한 감정적인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이 세상의 모든 자식은 가장 큰 상처를 대부분 부모로부터 받게 되고 부모와 자녀는 다 함께 그 상처의 이유도 치유방법 모르는 채 상처의 아픔을 이웃에게 확대재생산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인 것이다. (시편 27:10),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완전한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적인 상처는 대를 이어가며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부모가 부모 역할을 자신들의 선조로부터 배운 것이지, 교육 전문가로부터 배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세례를 받을 때 사제가 “마귀를 끊습니까?”하고 물을 때 “예”하고 대답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마귀들 중에 가장 경계해야 할 마귀가 바로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감정적인 상처와 선조들의 좋지 않은 가정교육”이다. 그 잘난(?) 가정교육이 양반 집안입네 하고 전통이 되어 내려 온 것이다. 다른 집안은 우리 집안보다 가문도 좋지 않고 상놈집안 교육이라서 전혀 배울 것이 없다고 무시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경주 최 부자(富者) 가문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전통으로 살아온 가문이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한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까지 보듬고 도리어 축복할 수 있는 넉넉한 은총과 의로움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셨다.(로마 5:17) 성령(聖靈)은 누구의 전유물(專有物)도 될 수 없으며 성령이 가고 싶은 데로 바람처럼 간다.(요한 3:8) 성령은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선물로 혼자서 독차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창조물도 하느님의 자유의지를 알 수 없으며 표현할 수도 없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듯이
교회도 항상 여러 분파를 만드는 경색된 입장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편에서는 오히려 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오늘의 독서는 마치 “진입금지”라는 도로 표지판을 말하는 것 같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서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14:6)
그분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 생활의 풍족함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시키셨음을 교회는 선포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2코린5:18-19)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善)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가톨릭의 교리에 어긋나지도 않을 뿐더러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이방인인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그리스도 정신일 뿐이다.(마태오 8:10)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적(敵)으로 만들게 된다.
이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도 통하는 진리이다.
교황청 강론 사제인 라니에로 칸탈라메싸(Raniero Cantalamessa) 신부가 말했다.
"우리는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많은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류 발전에 진정으로 공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정의 전통 교육에 따라 길러지게 된다.
과거의 시계에 맞춰져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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