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요한복음 6장 생명의 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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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병찬 | 작성일2009-09-27 | 조회수53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6장은 두 개의 표징(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과 이 표징에 대한 해설을 제공합니다. 공관복음 또한 이 두 개의 표징을 연결시켜 배열해 놓았는데 복음사가들은 이 유명한 오병이어의 표징을 광야에서 만나를 받았던 과거의 사건과 연결시키는 한편 성체성사라는 미래의 사건을 예시하는데 사용합니다. 또한 물 위를 걸으신 표징은 출애굽 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해 내실 때에 바닷물을 제어하셨던 그 권능이 갈릴래아 호수의 물을 지배하시는 예수님 안에 들어있음을 가리키고자 함을 알 수 있습니다. 6장의 후반부에서 복음사가는 성체성사에 근간이 되는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거룩한 빵과 포도주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을 믿는 신앙은 예수의 신성을 믿는 신앙만큼이나 신비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이 신앙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간직하지 못한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때가 되서야 주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구문 해설 6,20 :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 여정에서는 '나다'라는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때 "나다"는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 "나는 곧 나다"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탈출 3,14) 즉 요한에게 있어서 이 구절은 곧 '나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닌 자이니 거친 풍랑을 두려워할 것 없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6,27 :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 때 여러 가지 현세적인 혜택을 받게 되지만 (정신적인 평화, 친목 등) 이는 일종의 부산물로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 주된 목표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단 하나의 올바른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결합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6,35 :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 유다인들이 만나를 들어 모세의 위대함을 언급하며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실 것을 강요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십니다. 부활 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성체성사를 그리스도인의 과월절 행사로 거행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출애굽의 기념으로 지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만찬을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념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체성사로써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현존케 해 주는 것 이상의 무엇이었는데 이는 곧 주님께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 생명의 빵은 곧 예수 자신이라는 것, 구원의 잔은 제자들 가운데 실제로 현존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것 만큼이나 신비로운 것으로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셔야만 이 신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6,55 :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 성체성사에서의 예수님의 살과 피는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음식이요 음료임을 나타냅니다. 6,51 :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 이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곧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56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들은 예수님과 아주 친말한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살과 피를 나눈 형제와의 결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 다시 말해서, 그분의 십자가상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과의 결합입니다. 6,57 :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에 그 결과 마지막날에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이 되기도 한다. 6,63 :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 어려운 말씀입니다. 여정에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님의 성체성사적 현존은 죽음과 부활 이전의 제한되고 현세적인 현존상태가 아니다. 지상에서의 그분의 살과 피는 모든 사람들의 살과 피와 같았다. 그렇기에 그분의 살과 피를 언제나 모든 제자들에게 나누어줄 수는 없었다. 그에 비해 성체성사적 현존은 성령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여 하느님의 현존 안에 들어가심으로써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여전히 사람이시지만, 영광에 싸이고 한계를 벗어났으며 하느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과 당신의 완전한 인성을 나누실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참고 : 뜻 해설 갈릴래아 호수 : 남북 14마일 동서 9마일의 호수로 수면이 지중해보다 208미터나 낮음. 성서에는 갈릴래아 바다라고도 한다. 우리는 이 호수에서 예수님의 많은 행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1) 풍랑을 잔잔케 하시었고 (마태 8,26) (2)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의 4제자를 이 호수에서 부르셨으며 (마태 4,18.21). (3) 또한 일곱 비유를 가르쳤다(마태 13장) (4) 또한 바다 위를 걸으셨으며 (마태 14,22; 요한 8,16-20) (5) 부활 후에 이 호숫가에 나타나서 그물을 배 우편에 던지라 하시여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심(요한 21장)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행한 24회의 기적 가운데 18회를 이 호수에서 행하셨음. 티베리아 : '지킨다'라는 뜻으로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는 도시로 현재는 티베리아스(Tiberiasd, Tverya)로 부른다. 갈릴리 해변에 거주했던 만 오천명의 9개성 중에서 디베랴 외에는 남아있는 성이 없다. 주후 20년경에 해롯 앝티파스가 세운 곳인데 당시 황제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디베랴라는 이름을 붙였고 갈릴래아 호수도 티베리아 호수라 부르게 되었다. 데나리온 : 신약 성서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화폐의 단위로 일군의 하루 품삯을 말함. 죄사함의 정도를 빚의 양으로 설명하는 예수의 비유에서,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을 각각 빚진 것으로 등장한다(루카 7,4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는 강도 당한 이를 여관에 맡기며 여관주인에게 사마리아인이 차후 완불을 약속하며 선불한 숙박요금이 2 데나리온이었다고 전한다(루카 10,35). 마르꼬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군중을 먹일 식량 대금으로 200 데나리온(마르 6,37; 요한 6,7), 여인이 예수에게 부었던 향유 가격으로 300 데나리온(마르 14,5; 요한 12,5)이 거론되고 있다. 요한묵시록은 기근 시에 밀 한 되의 가격이 1 데나리온까지 올랐다고 기록한다(묵시 6,6). ('여정' 참조)
[9월 28일, 월요일] 생명의 말씀 '복음' <루카 9,46-50>
[9월 28일,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말 없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떤 단체든 ‘내색하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껴안으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튀는 사람만’ 붙잡으면 점점 옹졸해집니다. 눈앞의 사건에만 매달리면 멀리 보지 못하게 됩니다. 깊은 강은 언제나 조용히 흐릅니다. 얕은 강이기에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속 깊은 사람’은 깊은 강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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