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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사진출처/The Catholic Worker Movement 홈페이지) |
<사목헌장>에서는 현대세계의 경제-사회생활을 식별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은 “어떤 경제 만능주의 정신”에 물들어 있다고 보았으며, “경제생활의 발전이 합리적으로 또 인간답게 지도되고 조정되기만 하면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때로는 더 자주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또 어떤 곳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퇴보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사목헌장,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아울러 이 시대는 사치와 빈곤이 함께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의회는 이러한 불평등한 상황은 “시정할 수 있고 또 시정하여야 한다”고 확신하면서 경제-사회생활의 수많은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위해 모든 사람에게 자세와 발상의 전환을 요청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63항).
공의회에서 말하는 대안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발전’인데, 생산의 근본 목적은 단순한 생산품의 증가 또는 이익이나 지배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 대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곧 경제생활이란 인간의 물질적 필요와 지성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의 요구를 다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64항).
한편 공의회는 인간 진보가 인간에게 커다란 선익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큰 유혹도 함께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오로지 자기 것만을 헤아리고 남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세상은 이미 참된 형제애의 자리가 되지 못하고, 인류의 증대된 힘은 벌써 인류 자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인간 진보가 인간의 참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세상을 본받지 마라”(로마 12,2)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2-23)라는 말씀처럼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신 분께 그 피조물에 대하여 감사하고 청빈과 자유의 정신으로 피조물을 사용하고 누리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3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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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공동체에서 일하는 피터 모린(사진출처/The Catholic Worker Movement 홈페이지) |
공장제 산업사회를 넘어서는 대안
피터 모린은 기본적으로 공장제 공업사회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가졌다. 소비욕구와 탐욕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실업자를 낳으며, 인간의 탐욕을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부추김으로써 인간성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 길드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피터 모린이 제안했던 프로그램은 농촌에 농경공동체-농경대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훨씬 도시적이었으나 농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피터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피터 모린의 생각에, 농경공동체는 공황시기에 머물 곳과 음식을 마련해 주어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으며, 산업경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순환적인 실업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농경공동체는 농작법과 수공제조법을 도시 거주자들에게 훈련시킬 것이며, 이러한 훈련과 양성은 또한 점차적으로 땅과 마을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갈 길을 마련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농작과 손노동으로 이윤보다는 실용적 필요에 따라 생산하도록 이끌고, 나아가 협동의 가치관과 영적 차원을 다시 발견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피터 모린이 보기에, 농촌과 도시 사람들의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땅에서 사는 것은 협력과 필요한 정도만큼의 경제를 장려한다. 도시의 인위적인 세계보다 땅에서 살아야 인생철학은 기계적이기 보다 유기적이 되며, 개인적이기 보다 가족 중심적이 된다. 아이들이 환영받으며 노인들은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농작과 수공업 문명 속에서 책임감이 회복되고 노동의 전체성(통합성)이 살아나면 자기존중의 의식과 존엄성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인격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공동체에 중요한 봉사를 하겠다는 책임감을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땅에 있는 환대의 집
가톨릭일꾼운동 초기에, 이 농경공동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싹을 틔웠다. 공동체들은 다양한 크기였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가까운 도시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과 연결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스톤에 있는 농장에는 1938년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트밀, 옥수수, 감자, 복숭아와 사과나무, 그리고 각종 과일나무들을 키웠다. 그들은 마당에 빵 굽는 오븐을 걸어두려고 했고 신발을 수선하고 옷을 깁고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경당도 세울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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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학습과 성찰, 노동으로 통합을 꾀했던 피터 모린(사진출처/The Catholic Worker Movement 홈페이지) |
또한 이러한 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특별한 것은 이른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농부와 목수, 전기 기술자들, 하수도 기술자 등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이다. 이 전문가들은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사람들, 혹은 도시의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친구들이기도 하였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삶에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1949년 피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도로시 데이는 이 농경공동체를 ‘땅에 있는 환대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골에 마련했던 농장들이 정통성 시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자,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가족들이 평화롭게 모이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장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도로시는 배가 고파서 줄을 섰다가 가톨릭일꾼운동을 알게 되어 거처를 시골로 옮겨 오게 된 사람들을 위한 ‘환대의 집’으로 농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피터의 구상이 너무 높은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시에 농장은 집단이나 개인이 피정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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