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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과 포기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30 조회수1,153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26주간 수요일 - 사랑과 포기

 

 

 

저는 요즘 길에서 차를 볼 때마다 공부 끝내고 와서 어떤 차를 사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부좌 때 2000cc 급의 차를 탔는데 강론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가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1600cc 정도면 문안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사제는 가난해야 하니 돌아오자마자 딴 생각이 들기 전에 마티즈와 같은 더 작은 차를 사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옵션은 밖에서 보이지 않으니 좋은 사양으로 선택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것은 가난도 아니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무엇처럼 생각이 되었고 내 자신이 가식적으로까지 느껴졌습니다.

신학생 때는 차도, 핸드폰도, 옷도 사지 않고 참으로 가난한 사제의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정신이 사라지고 ‘사되 남들이 보기에 적당한 수준으로...’라고 하며 세상과 타협해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차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신부님도 알고 있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 결국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조금씩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40대 전후로 보이는 어떤 자매님이 면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얼핏 보니 결혼을 못 한 것 같았고 그래서 좀 외롭고 날카로워 보였습니다.

그 자매님은 그 본당에 처음 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냥 성당을 지나다가 갑자기 그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를 만나보라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 안에는 마귀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완전 전설의 고향 분위기였지만 기세에 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집무실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자매가 사는 곳을 틀리게 이야기 했더니 목소리까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이 안 되게 위협적으로 변하면서 그것도 못 기억하느냐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일면 겁도 났지만 겁내면 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당신은 한 번 들은 것은 다 기억합니까?”하며 도리어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물론 아니지요.”하며 좀 수그러들었습니다.

물론 예상대로 노처녀였고 직업은 보험설계사였으며 마귀와 이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밤에 함께 잠자리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께 “사실 마귀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허락해서입니다. 내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마귀는 물론 하느님도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귀가 내 자신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이유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외롭지 않게 관계 맺으며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지만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을 버리고 외로워져서 결국엔 마귀라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쪽을 받아들이느냐가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매님이 마귀를 버리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싶으시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교만과 육정과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결국 자매님이 순종과 정결과 가난을 선택하시면 마귀는 떠나고 하느님과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매님이 지금 원하시고 있는 것들을 계속 원하신다면 마귀는 항상 자매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제 마귀와 육정과 재물의 욕심을 끊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는 ‘나는 그것들을 끊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을까요?’하는 뜻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배가 하나는 강을 따라 내려가고 하나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두 배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배에 올라타면 다른 배는 포기해야 합니다. 신앙이 그렇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육체적인 편안함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결정을 하라고 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않는 자녀는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떠나라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그리고 자신이 버리고 온 것들을 뒤돌아보는 사람, 특별히 가족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영웅적인 포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쩌면 적당히 타협하여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외에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에 대해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합니다. 자신을 먼저 찾으면 상대를 잊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한 포기를 전제로 하고 타협이란 참사랑을 오염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십자가상에서 모범을 보이셨던 영웅적인 포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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