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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6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07 조회수42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직접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는 특별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헛된 기도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빈말의 기도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므로 주님의 기도가 아닌 그 어떤 기도를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만을 기도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그 어떤 가르침도 우리 신앙 속에 존재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편의상 우리가 늘 기도하는 기도문으로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신 이 말씀 속에는 동서양의 주요 사상이, 고대 그리스철학으로부터 현대철학의 주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여 오늘 묵상은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사상적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합니다.

20세기 현대철학은 하이데거를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을 꼽으라면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이 두 분은 1889년에 태어났으며 하이데거는 87세의 나이로 1976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비교적 장수한 철학자이며 그는 다른 철학자와는 달리 평생 동안 ‘존재’라는 하나의 명제에만 집착하였습니다. 오늘 묵상에서 하이데거를 언급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이 말씀은 바로 존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며 ‘존재’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평생 숙제였던 ‘존재’에 대하여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던진 명제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입니다. 이 명제가 의미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 존재를 대상화하여 어떠한 목적으로 이용하게 되므로 그 본래의 고유성은 이미 상실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대상화하면 목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나무는 목재가 되고자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므로 존재자로 대상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떤 신분으로 정의해 버리면 그 사람의 본래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그 신분이 대상화되어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에 그 고유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며, 고유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physis라 하였으며 물리학(physics)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하신 말씀에서 ‘드러내시며’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physis에서 유래된 듯하며,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을 창조주로 규정해 버리면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창조주라는 상이 만들어 지므로 하느님의 참모습은 잊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하신 이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하여 존재자 등으로 어떠한 상도 만들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경이로움과 신비스러운 아버지의 참모습이 들어난다는 말씀이며, 본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불교에서는 如如또는 眞如라 합니다. 이러한 진여는 우리가 어떠한 상을 전부 비울(空)때에 즉 眞空에서 그 묘한 모습이 드러나므로 이를 眞空妙有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창조주로 규정을 해버렸습니다. 창조주이신 존재자로 규정하였기에 그에 따른 우리의 사고가 수반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 인해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신 하느님은 이 땅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기에 그 대리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지방에 있는 소작농민들은 한양에 거주하는 지체 높은 지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그 대리자인 마름이 지주 노릇을 하며 지주의 이름으로 온갖 횡포를 부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중세에는 ‘신의 이름’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민중들을 핍박하였던 것이 우리 교회사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아버지 하느님에 대하여 창조주로 또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정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정의하였다면 마태 복음서에서는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루카 복음서에서는 ‘너희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을 비운, 물론 자신조차도 비운 완전한 眞空상태에서 경이와 신비를 간직하신 완전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온전히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시어 거룩히 빛나시는 그 모습을 저희들도 볼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한다하여도 그것은 우리의 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참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말씀은 하늘에서는 그 어떤 장애도 없으므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고 있으나 땅에서는 저희들에 의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장애를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장애를 없애고자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므로 우리 신앙은 이 땅에서 그런 장애를 없애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장애가 없어지면 바로 하느님의 뜻이 제대로 작동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며 불교에서는 이런 장애가 없는 상태를 事事無碍라 하며 모든 인연들이 걸림이 없이 온전히 작동되는 사사무애의 상태를 華嚴이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말씀은 이 땅에 장애가 없으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므로 physis이며 이를 다른 표현으로는 ‘자기 전개’라 하며, ‘자기 전개’를 우리 동양사상에서는 ‘스스로 그리하여 진다’ 하여 自然이라 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physis와 동양 철학의 자연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무엇으로 정의하려는 습관이 있으며 정의를 하여도 어차피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로 정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잘 지적한 말은 노자 도덕경에서는 ‘무엇을 무엇으로 이름 지으면 늘 그러한 것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하였으며, 앞에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은 서양 철학에서는 그동안 문제 삼지 않았던 언어의 한계성을 자신의 철학의 명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세계의 한계는 나의 한계이며, 나의 한계는 언의 한계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이 말은 노자는 名可名 非常名으로, 선불교에서는 不立文字로 이미 정리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은 무엇이라 부를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는 그분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언어로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을 뿐 그분에 대하여 그 어떤 표현으로도 정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숱한 표현으로, 존재자로 정의하여 수시로 그분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자로 전락시킨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인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는 이런 오류를 없애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느님을 부르고 있으므로 두 번째 계명을 수시로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입으로 함부로 부르는 그런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신앙의 주요 이론인 신학은 철학사에서는 중세철학에 해당되며 그 토대가 되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모든 것의 원본이 되는 것을 이데아로, 그를 닮고자하는 현상을 모사물로 구분하였으며, 이데아의 개념은 우리 신학에서 하느님의 개념과 놀랍도록 동일합니다. 또 이 세상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을 로고스라 하였으며 로고스를 알고자하는 충동과 욕망을 에로스라 하였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신학이론의 주요 토대가 되었으며 신학에 의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은 잊혀져야 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아론이 비로소 등장하며 근대철학이 시작되었으나‘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당시만 하여도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기본 명제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서양철학은 신학에 의해 사라졌던 고대 그리스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현대 서양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니체와 현대철학의 거목인 하이데거의 원래 전공도 고대 그리스 철학의 문헌학이었습니다. 참고로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으며 하이데거는 성당지기의 아들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하였고 가톨릭재단의 장학금으로 신학과에 진학하였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그리스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본 가르침도 사람의 존재를 하느님의 종으로 대상화하지 말고 인간의 고유성 즉 존엄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므로 거기에는 그 어떤 지배논리도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가 나와 한 형제자매이므로 오직 자비와 사랑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갈수록 각자가 가진 자기만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대상으로 파악하여 지배 또는 이용하려고 하고, 능력을 평가하여 도구화하고,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한 기계의 부품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인간성 상실의 위기는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예수님은 이미 이천년 전에 모두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압축한 것이 ‘주님의 기도’이며 그 중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짧은 지식에 불과한 서양철학의 개론과 접목시켜서 주님의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였으나 역부족입니다.

오늘 마침기도는 나머지 주님의 기도를 하나하나 다시 음미하며 주님의 기도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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