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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기도 해설> - 루카 11,1-4 본격해설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07 조회수996 추천수1 반대(0) 신고
 

기도에 관한 가르침(11,1-13)

이 본문은 마태 6,9-13; 7,7-11과 병행한다. 이 대목은 주님의 기도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는 서로 다른 전례 전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마태오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는다. 그에 비해 루카는 다섯 가지 청원만 담는다. 그런 차이가 있어도, 많은 사람들은 두 기도문이 ‘Q’ 자료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루카가 그 자료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연설에 말을 덧붙이는 습관을 보이고 있다. 이런 유형의 시적 구조는 주후 1세기 회당들에서 바치던 기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주님의 기도는 그 내용이 대부분 구약성경과 이스라엘 문화의 고유한 개념들을 담고 있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적인 기도의 본질적인 주제들을 짧고 단순한 양식으로 취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ㄱ) 이야기하는 식의 들어가는 말이 나온다(1절). ㄴ) 다섯 청원을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된 청원 두 가지와 인간들의 필요에 관련된 청원 세 가지로 되어 있다(2-4절). ㄴ) 기도하라는 권고가 나온다(5-13절). 예수께서는 두 가지 예를 들면서 그 권고를 하고 기도의 결과까지 말씀하신다.

1절: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셨다(3,21의 주 참조).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처럼(참조. 5,33), 자기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라고 청한다.

2-4절: 루카는 그저 ‘아버지’(‘우리 아버지’가 아니라)라고만 말한다. 이는 아마 예수께서, 당시에 친밀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에 따라서 하느님을 ‘아빠’(마르 14,36; 갈라 4,6; 로마 8,5)라고 부르신 습관을 반영할 것이다. 이 호칭은 아마 예수님 자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의 더 긴 표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은 유다인들의 기도방식과 가까울 것이다. 하느님의 부성(父性)에 관한 언급은 루카 복음서에 여러 차례 나온다(6,35; 20,36).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국가가 재난을 당할 때, 집단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참조. 2사무 6,2; 신명 32,6; 예레 3,4-5; 7,11; 이사 64,7-8).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라는 청원은 주님의 기도 안에 종말론적 동기를 들여놓는다(이사 29,23). 에제 36,22-28에서 하느님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당신 백성을 구출해 내어 거룩한 당신을 섬기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는 자기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레위 11,45; 이사 5,16; 에제 20,41).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당신 이름을 드러내고 다지신다(마르 1,23 이하; 요한 12,27 이하). 특히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순간에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는 순간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난다(요한 16,14).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라는 둘째 청원 역시 종말론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루카 10,9-11; 17,20; 22,16.18). 루카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마태오처럼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표현이 꼭 사람의 아들이 곧 와서 하느님의 나라가 들이닥친다는 뜻은 아니다. 루카는 때때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주권 행사’ 또는 ‘다스림’이라는 의미로 말한다(루카 4,43; 8,1; 9,2.11.60; 11,20; 12,32 등). 그러나 또 어떤 때는 하느님의 나라에 더 특수하고 구체적인 의미를 준다. 즉 특정한 사람들(6,20; 18,16; 참조. 9,62) 또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거나(18,17.24.25),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거나(10,9.11; 17,20 등),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루카 16,16). 하느님의 나라는 현존하여 있으며(온다, 오고 있다; 참조. 17,21), 장차 올 것이다(참조. 22,16.30). 하느님의 나라를 뛰어나게 설파한 분은 예수님이시다(루카 4,43).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몸 바치겠다는 것을 뜻한다(마르 10,29를 루카 18,29와 비교해보라). 

셋째 청원은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이다. 마태오는 ‘세메론’(‘오늘’, ‘이 날에’)라고 말한다. 그에 비해 루카는 ‘카테메란’(‘날마다’)이라는 낱말을 쓴다. 그리고 연속성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를 사용한다. 그래서 종말론적 해석(마태오 복음서에서 더 강하게 나온다.)이 더 시급한 일상 문제에 대한 걱정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필요한 양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양식에 대한 암시(참조. 탈출 16,4; 시편 78,24)는 공관복음서들과 요한 6으로 하여금 순전히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양식에 대하여 언급하게 한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교부들은 이 양식을 성찬으로 알아들었다(참조. 루카 9,17).

“저희도 용서하오니… 용서하소서.” 마태오는 ‘잘못’(‘빚’)에 대하여 말하지만, 루카는 죄를 용서하여 주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 시제를 사용한다. 이 청원은 시편 25,11; 51,5-6; 130,8을 되울리고 있다. “내가 너에게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주라.”는 식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아야 한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구약성경에서는 흔히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시험하신다고 말한다(탈출 16,4; 20,20; 신명 8,2.16; 13,4 33,8; 판관 2,22). 그리스어 본문은 “우리는 유혹에 들지 않게 하소서.”(‘메 에이세네케스’)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과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것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 이 셈족 표현은 이 청원을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도록 청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도록 인도한다(야고 1,13-15). 유혹의 긍정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야고 1,12; 묵시 2,10; 1베드 4,12-13을 참조하라. 루카는 ‘메’(‘안’ 된다)라는 부정 분사를 과거 접속법과 더불어 사용한다. 그렇게 하여 미래에 일어날 유일한 시련, 즉 묵시문학이 말하는 마귀의 마지막 공격을 암시한다. 또 다른 해석은 여기에서 말하는 유혹이 배교를 하게 하는 유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 그런 위험은 마지막 순간에 한정되지 않고,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어 있다(루카 8,14-15; 사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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