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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복선언(마태 5,3-16) 본격해설>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07 조회수849 추천수0 반대(0) 신고
 

행복선언(5,3-16)

산상 설교는 일련의 새로운 행복선언 또는 기쁜 선포로 시작한다. 행복선언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에게 “그대는 행복합니다.” 또는 “그대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단언한다. 어떤 때는 그런 존재인 그 사람 또는 그 사람들(예를 들어서, 루카 6,20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 또 어떤 때는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 또는 그 사람들(예를 들어서, 마태 5,9에 나오는 ‘본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포한다. 이 행복선언 양식들은 성경에 매우 자주 나온다(참조. 시편 1,1; 집회 25,8-9; 마태 11,6; 13,16; 16,17; 루카 1,45; 11,27-28). 그 행복선언은 보통 기원, 축복 또는 약속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즉 행복하다고 선언할 따름이다. 행복하다는 선언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이미 행복한 상태에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한 줄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행복선언은 일반적으로 이미 인정하고 있는 가치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이 그 가치를 가치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참된 가치인지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참조. 예를 들어서, 집회 26,1: “좋은 아내를 가진 남편은 행복하다!”). 그에 비해,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그와 다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흔히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뜻 보기에 분명치 않은 가치들을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치들이 정말 참된 가치임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선언에서 말하는 행복은 역경과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행복선언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는 ‘미래’ 때문에 ‘지금’ 행복한 사람들이다. 현재가 고통스럽고 짐스러울지라도, 미래에 받을 행복에 희망을 두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과 짐이 불행이 아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를 겨냥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별로 흐뭇하지 못한 상황을 묘사하는 앞부분과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상기시키는 뒷부분 사이의 긴장은 희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라는 초대가 된다.

루카와 달리, 마태오는 자기 행복선언 안에다 그 행복 하나하나 안에 들어 있는 약속을 조건 짓는 일정한 윤리적 태도를 설정한다. 그런 식으로, 산상 설교는 처음서부터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일정한 그리스도교 덕목들을 제시한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바친 예배의 입당 예절을 상기시킨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를 앞선 전승,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전승을 형성한 유다그리스도교 분위기 속으로 우리를 들여보낸다.

행복선언의 배치는 히브리 시의 병행성을 상기시킨다. 마태오는 분명히 자기 복음서를 정돈하면서 일정한 대칭을 추구한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구조화한 대목 가운데 하나다. 처음 여덟 가지는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로 끝나는 3절과 10ㄴ절 사이에 들어 있다(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세부 사항은 넷째 행복선언의 첫 마디와 여덟째 행복선언의 첫 마디가 ‘정의’라는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복음서 저자가 11절의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말과 12절의 “너희는 기뻐하라.”라는 말을 끌어내기 위하여 네 마디 하나하나에 두 음절을 집어넣으려 했다는 주장은 안전한 주장이 못 된다.

‘첫째 행복선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오셨다(참조. 11,5).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약속하신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루카와 달리(참조. 6,20), 마태오는 ‘프토요이 프네우마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첫째 행복선언은 기본적으로 각 사람 마음속(사람의 깊은 내부)에 뿌리내린 가난에 대하여 말한다. 이 가난은 순전히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다. 윤리적 자질과 종교적 태도를 내포한 가난이다. 한 마디로, 영적 자세를 가리킨다.

그와 비슷한 모양으로, 여섯째 행복선언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한다. 이때는 ‘깨끗한’(‘맑은’, ‘흠결이 없는’)이라는 형용사에 마음의 태도가 덧붙여진다. 그것은 깨끗함의 마지막 뿌리가 사람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참조. 마태 23,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그와 비슷한 표현, 즉 스스로를 높이 보는 마음(‘교만’), 스스로를 낮게 보는 마음(‘겸손’), 넓은 마음(‘인내’), 좁은 마음(‘성급함’) 등의 표현이 성경에, 특히 지혜문학적 기록물들에 자주 나온다.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데 필요한 기본 태도를 표현하는 첫째 행복선언은 나머지 모든 행복선언의 기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교만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적을 결코 내세우지 않는다. 자만하기는커녕, 자기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한다. 구원이, 자기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앞서,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선물,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잘 알고 있다.

70인 역 그리스어 성경번역본에서, 그리스어 ‘프토호스’라는 낱말은 세 히브리어 낱말, 즉 ‘아니’(‘가난한 사람’, ‘억눌리는 사람’, ‘기가 꺾인 사람’), ‘달’(‘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에비욘’(‘부족한 사람’, ‘궁핍한 사람’)이라는 낱말을 번역한 것이다. 그 모든 개념은 우선 경제적인 의미의 가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점차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그 영신화 과정이 시편 안에 나와 있다. 예를 들어서, 시편 69에서(70인 역에서는 68편)에서 가난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33절)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37절) 사람들과 동일시되고 있다. 시편작가는 자기 자신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긴다(“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습니다.”, 30절). 즉 억압자들의 불의함과 잔인함에 희생된 사람으로 여긴다. 땅 위에서는 아무 것도 집착할 것이 없는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란다.

그 영신화 과정에서 스바니야 예언자가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기록물 안에서 가난이라는 개념이 영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스바니야 앞에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고질적인 가난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정의를 부르짖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열렬히 감싸게 했다(참조. 아모 26-16; 이사 5,8-10). 스바니야는 가난이라는 낱말을 다시 취하면서 그 낱말을 변형시킨다. 그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믿음에 뿌리를 둔 영적 태도, 겸손하게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께 절대 의탁하는 태도, 즉 영적 가난을 추구하라고 초대한다(스바 2,3; 참조. 3,12-13).

그런 행복선언의 의미는 꿈란 공동체의 문헌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지극히 경건하지만 매우 법률주의적인 신심을 가진 그들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이라 부르고, 자기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어김없이 지키기 때문에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와 똑같은 노선에서, 마태 5,3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물려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겸손하고 양순하고 인내로운 영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인격적 결단을 통하여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첫째 행복선언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는 느낌, 강하게 뿌리내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행복선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단순한 사람들, 메시아 시대가 와서 거의 언제나 고통스럽고 짐스럽기만 한 자기네 삶의 조건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주리라 기대하고 있던 그 사람들에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사전에 그 어떤 설명이나 주의도 없이,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물론, 복음서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나타내면, 그것은 매우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삶의 형태로 본 가난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오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구절을 보고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 비참한 지경에 사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몰락한 사람들 앞에서 부자라도 마음만 가난하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모욕이 아닐 것인가? 첫째 행복선언에 대한 그런 오해는 불의한 기존질서를 인정하고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참상을 정당화하는 외에, 가난에서 빠져나오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열망을 잠재우고 제거한다. 부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뜻밖의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고, 불의에 희생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 불행을 체념한 상태에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이의제기는 첫째 행복선언을 읽고 들을 때, 거의 피할 수 없게 제기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의제기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첫째 행복선언의 의미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마태오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혼을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암시한 개념에 따라서 마태오는 가난을 하느님께 열려 있는 영적 태도와 동일시한다. 그 영적 태도는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재물뿐 아니라, 소질과 능력까지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쓰라고 맡기신 당신 소유이지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철저한 깨달음과 마음자세, 그리고 그 인식에 따른 실천을 가리킨다. 물질적 가난은 ‘마음으로 가난함’에 도달하기 위한 특권적인 길이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유일한 길은 아니다. 마태오가 보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해서 그 자체가 결코 행복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자동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솟아나는 겸손하고 신뢰에 찬 자세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열어드림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구원은 사회적 또는 경제적 상황과 처지에 매여 있지 않다.

마태오와 달리,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들과 더 가깝게, 루카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루카는 실제 생활조건을 말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루카 6,20-22). 루카는 아주 참담한 상황에서 부자의 문간에 앉아 있는 거지 나자로의 지독한 가난을 좋은 예로 든다(루카 16,19-31). 그러면서도, 루카는 극빈 상태, 사회적 내지 경제적 참상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가난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왕으로서 당신 통치권을 수립하고 행사하는 데 가난한 사람들을 앞장세우시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은 -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네 하느님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던 것은 - 각 사람이 사람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72에서는 이상적인 왕을 가난한 사람들과 힘이 없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합니다.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시편 72,12-14)

이상적인 왕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고아, 과부, 짓눌리는 사람, 떠돌이를 보호하고 감싸는 왕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의 보호를 가장 받지 못하고 있고, 인간으로서의 자기네 권리를 빼앗길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념의 기초 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네 왕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통치권을 행사하실 때, 당신 정의를 손상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강자들의 탐욕과 인색함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주님이 몸소 새로운 질서를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루카는 자기가 이해하는 가난(말하자면, 물질적 가난) 자체는 싸워서 이겨내고 없애야 할 악임을 잘 알고 있다. 가난 자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장해야 할 이상이 되기는커녕,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고, 당신의 영예에 대한 먹칠이다. 그리스도교가 이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가난을 사랑하는 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구체적인 표현은 궁핍한 사람들과 맺는 연대요 그들에 대한 형제애다(참조. 루카 12,33-34; 19,7-10).

예수께서는 경제구조의 개혁이나 사회질서의 변혁을 당장 완성시키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부자들에게 퍼부은 그분의 경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기울인 그분의 애정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으려는 당신 의지를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전언은 루카의 전언과 완전히 합치한다. 마태 25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라고 장엄하게 선언하신다.

‘둘째 행복선언’: ‘슬퍼하는 사람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받고 있는 숱한 고통을 잘 알고 계신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자기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느님이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고 계신다고 단언하신다. 어느 날엔가는 몸소 슬퍼하는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위로하리라고 확언하신다.

성경에 따르자면, 슬픔은 여러 이유로 생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창세 23,2; 37,33-35; 2사무 19,1-5; 예레 6,26), 나라가 재난을 당하거나 불행해질 때(이사 3,25-26; 예레 14,1-6; 애가 2,1-11), 지은 죄가 무겁고 버거울 때(시편 32,3-4) 사람들은 슬퍼한다. 부당하게 억압을 당할 때(1마카 1,21-28; 2,6-14), 하느님께 받을 벌이 두려울 때(아모 5,16-17; 묵시 18,7-8)에도 사람들은 슬퍼한다. 그와 같은 숱한 경우에 사람들은 정말 슬퍼진다. 그 슬픔은 안으로 느끼는 감정 이상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자기 고통을 숨기지 않는다. 탄식하고 통곡하고, 상복을 입기도 한다.

이름 없는 예언자가 쓴 이사 61,1-2에서처럼, 예수께서는 정말 인간으로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장차 위로를 받으리라고 선언하신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왜 슬퍼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일이 남아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슬퍼하는 사람들이란, 그 슬픔과 고통의 원인과 출처에 상관없이 그저 슬퍼하는 사람들일까? 마태오가 행복선언의 내용을 영신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볼 때, 여기에서도 슬퍼하는 사람들은 윤리적 내지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선언은 우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들이 세상에서 적들에게 공격을 당해 겪는 고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참조. 요한 16,20-23). 예수께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샘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과 희망을 표현할 수 있고 종말론적 위로를 슬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파라칼레인’(‘위로하다.’)이라는 동사는 메시아 시대에 하느님이 개입하시리라 약속한 예언자들의 예고를 되울리고 있다. 그 시대에는 하느님이 몸소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이사 61,2-3)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위로와 복된 희망’(2테살 2,16)을 받았다. 그럴지라도 하느님의 약속이 결정적으로 실현될 여지는 늘 남아 있다. 지상의 그 어떤 상황도,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넘치게 받은 상황까지도, 시련의 때를 영원히 끝막음할 하느님의 위로를 받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주석가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이라는 낱말이 여기에서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온갖 불행해진 사람들, 비참한 처지에 몰린 사람들,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슬퍼하는 사람들 역시 기뻐할 일이 아무 것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그들을 위로하시리라는 뜻이고, 하느님이 몸소 그들의 처지와 상황을 바꿔놓으시리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마태오 복음서의 행복선언보다도 루카의 행복선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셋째 행복선언’: ‘온유한 사람들’(5,5). 이 행복선언은 고정된 자기 자리가 없다. 어떤 수사본들에서는 이 행복선언을 두 번째로 놓기도 하고 또 어떤 수사본들에서는 세 번째로, 슬퍼하는 사람들 다음으로 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수사본들의 숫자와 가치가 어디에 근거하는지에 관해서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오가 이 행복선언을 쓴 사람이라는 점을 의심한다. 왜냐하면 행복선언이 여덟 가지인데 마태오는 7이라는 숫자를 언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참조.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가지 청원, 13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비유, 14이름에 3묶음으로 나누어진 예수님의 족보[14=7x2]). 그러나 이 세부 사항만으로는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한 행복선언을 필사자가 덧붙였다고 주장하는 데는 충분치 못한다. 수사본들에서 순서에 차이가 난다면, 그 행복선언이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만일 마태오가 그 행복선언을 한 장본인이 아니라고 가정할지라도, 마태오의 행복선언을 특징짓는 영적 차원에 속해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도 앞에 나온 행복선언들의 윤리적 내지 종교적 범위가 다시 강조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 행복선언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적절히 특징짓는 ‘형용사’를 만나기도 어렵다(그리스어로 ‘파라우스’, 복수로는 ‘프라에이스’). 전통적으로는 ‘양순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 번역은 냉정하고 무심한 양순함을 떠올리게 할 수가 있다. 만일 5절이 시편 37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고려한다면, 다시 말해서, 불경한 자들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지혜문학적 시를 고려한다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시편작가는 그런 사람들더러,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9절) 절망하지 말라고(1.7.8), 다시 말해서, 인내를 잃지 말라고, 적개심에 끌려가지 말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행복선언은 무엇보다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폭력을 견디면서 낮추어질 대로 낮추어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행복선언에 들어 있는 약속(“땅을 차지할 것이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 상황이 철저히 뒤바뀌리라고 말한다. 세상의 눈에는, 그 사람들이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몸소 개입하여 그들의 불행에 마침표를 찍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실 것이다. ‘유산으로 물려주다.’(그리스어로, ‘클레로노메오’)라는 동사는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 아니라 기대하던 선물, 공으로 받는 선물, 헤아릴 길 없이 큰 선물을 가리킨다.

이 행복선언은 때때로 첫째 행복선언(“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연장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마태오와 마태오 복음서의 전달대상자들이 ‘프토코이’(‘가난한 사람들’)라는 낱말과 ‘프라에이스’(‘양순한 사람들’, ‘참는 사람들’ ‘폭력을 쓰지 않는 사람들’)라는 낱말의 차이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복음적 역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 폭력주의자들이라고 가정할 때, 폭력은 ‘권력’과 동일시되고, 양순함은 ‘약함’과 동일시된다. 그에 비해, 복음서는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가르치고 있다. 참된 힘은 짓밟고 학살하고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활동에 협력하는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고 뿌리내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창조하는 것이지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창조하지 못하고 생명을 낳지도 못하며, 파괴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 행복선언을 고상한 이상향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현실이 바꾸어지려면, 단순한 열망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려면, 마지막 때가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간디, 마르틴 루터 킹과 같은 예들은 역사상 과거와 현재에 그 행복선언이 유효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마르틴 루터 킹은 이렇게 말한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미움이 불어난다. 그리하여 별도 뜨지 않은 밤 어둠이 더 깊어진다. 미움은 미움을 불어나게 하고, 폭력은 폭력을 불어나게 한다. 무정함은 무정함을 불어나게 한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는 파괴의 악순환이다.” 조금 뒤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악의 사슬에 반발하는 미움은 - 미움을 낳는 미움, 전쟁을 불러오는 전쟁은 - 깨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무화(無化)의 어둔 심연에 잠기고 말 것이다.… 벗들이여, 우리는 이미 다져진 길을 너무나 오랫동안 달려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정없이 더 큰 혼란을 겪게 되었으며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방에서 우리는 미움과 폭력을 선택한 공동체들이 망하는 것을 보아왔다. 우리나라와 인류를 구하려면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한다.”

양순한 태도는 하느님의 행동방식 및 활동방식과 맞아떨어진다. 하느님은 우리를 책임을 져야 하는 자유로운 존재,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 아브라함, 예레미야, 시편작가들, 욥이 그런 것처럼(참조. 창세 18,27; 예레 12,1-2; 20,7; 시편 73,13; 욥 23,1-7) 심지어 당신과 토론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의 자유를 짓밟거나 빼앗지 않으신다. 인간이 비굴하고 비겁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자유 없는 인간들을 통치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당신 백성을 옥죄지 않고, 강제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으신다. 그들을 온갖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쓰신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을 당신 자녀로 삼아 그들과 우정의 관계, 주인과 종 사이의 통상적인 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를 맺는 일이다.

‘넷째 행복.’: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5,6). ‘굶주리는 사람들’과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말은 불타는 열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은유는 성경에 자주 나온다. 아모 8,11에서는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작가는 자기의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참조. 42,3)

이 행복선언에서는 ‘정의’를 굶주리는 사람들, 정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마태오가 알아듣는 ‘정의’란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데 있다.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느님의 뜻에 완벽하게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나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당신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 뜻에서, 넷째 행복선언은 예언적 설교의 노선에 위치해 있다. 이사 58,4-7에서 말하는 대로, 이웃(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자기가 하느님 앞에서 정의롭다고 내세울 수 없다. “… 불의의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상에서 소개한 해석은 마태오의 여러 본문을 끌어다댈 수 있다. 마태오는 ‘정의’라는 낱말을 앞에서 지적한 뜻으로 사용한다(참조. 5.10.20; 6,1; 21,32). 그렇지만 어떤 성경해설가들은 마태오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는 하느님의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행복선언에서 말하는 정의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서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 사악함을 없애기를 열렬히 소망하는 사람들,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결정적으로 세우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실현되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된 배부름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다는 심상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참조. 26,29). 그리고 인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질서를 수립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에게 보상을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굶주림과 목마름이라는 은유는 열망만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없는 상태도 가리킨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결핍된 상태는, 단순히 올바르게 행동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과만 관련된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표현은,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정의,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온전히 실현될 정의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가리킨다고 말할 때, 그 온전한 의미를 되찾을 것이다. 이 해석은 또한 이 행복선언을 완성시키는 동기, 즉 “그들은 배부를 것이다.”라는 동기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과 목마른 사람들이 만족하는 상태는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상징하지 않고, 당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한다(참조. 6,25-26). 사실, 마태오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행위가, 그 사람들의 윤리적 상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에서, 하느님의 어지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5,45). 정의를 굶주리는 사람들, 정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할 만한 것이 없고, 무조건 기뻐할 이유가 없고, 재물을 탐할 까닭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세운 공덕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나라의 잔칫상에 앉으라고 초대하실 때 드러날 뒤바뀐 상황에 의하여 혜택을 받을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해석은 아마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몇몇 대목에서, 정의는 하느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인간들의 노력도 곁들여진 어떤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정의를 굶주리고 정의에 목말라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고 항구하게 실천함을 뜻하고, 또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온갖 희망이 막혀 있을 때 하느님이 당신 정의를 펼쳐 보이고 당신 통치권을 행사하시리라는 희망을 불태우는 것을 뜻할 것이다.

‘다섯째 행복선언’: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5,7) 이 행복선언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약속하고 있다. 산상 설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순전히 감정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는 마음의 느낌 정도가 아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이다. 자비는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웃(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도움으로 바뀌는 동정심이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결정적인 모양으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궁핍한 사람들을 실제로 도와주는 것을 뜻한다.

인정사정없는 종의 비유(18,23-35)가 이 행복선언을 잘 조명해줄 수 있다. 자기 종이 간절하게 빚 갚을 말미를 청하자, 왕은 동정심이 생겨서 그의 빚을 탕감해준다. 왕이 보여준 그런 마음과 행동이 자비로운 모습이다. 그런데 왕에게서 큰 빚을 탕감 받은 그 종은 자기에게 작은 빚은 진 친구를 모질게 대한다. 그 친구를 감옥에 처넣고 만다. 그 말을 들은 왕은, 비유의 결론으로, 그 종에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18,33)라고 말한다.

‘여섯째 행복선언’: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5,8) 이 행복선언을 알아들으려면, 성경에서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이 개념은, 현대 언어에서처럼, 정서생활, 감동, 감정을 가리키지 않는다.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심장이라는 기관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로 ‘마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2사무 18,14; 2열왕 9,24; 호세 13,8). 일반적으로, ‘마음’이라는 개념은 은유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 인격의 가장 깊은 뿌리, 생각이 솟아나는 원천, 열망하고 결단을 내리는 자리를 가리킨다. 하느님은 인간 존재들에게 생각하고, 선과 악을 가려내라고 마음을 주셨다(참조. 1열왕 3,9; 다니 2,30). 마음속에서 계획이 세워지고 실행하겠다는 결단이 내려진다(참조 2코린 9,7). 마음에 품은 생각이 입으로 나온다(마태 15,18). 따라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지향과 행동이다(마태 15,20).

구약성경의 몇몇 본문, 특히 레위기 본문은 예절적 정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정결 예절에 관한 규정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가리키는 깊은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과 마음속에 새겨주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자기네 본모습을 지키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때로는, 또한 하느님을 흠숭하고 당신께 영광을 돌리는 데는 일정한 예절적 실천을 실제 일상생활과 연관 지음이 없이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게 했다. 그래서 예언자들과 시편작가들은 ‘마음’이라는 개념을 내면화했다. 예언자들과 시편작가들의 기록물 안에는 깨끗한 마음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들어 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1,16)라고 이사야는 말한다. 이 말씀은 예절적 목욕을 행하라고 초대하지 않고, 죄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행동과 태도를 바꾸라고 초대한다. 그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시편작가는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라고 말하고, 예언자 요엘은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2,12-13) 하면서 참회하라고 다급하게 호소하고 있다.

마태오가 보기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란 사악한 생각에서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외적 태도는 ‘하느님’과 ‘우리 이웃인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과 상응한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서로 통한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래의 삶에서 뿐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을 편들고, 길을 갈 때면 그들을 동반해 주실 것이다.

‘일곱째 행복선언.’: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5,9) ‘에이레노포이오스’(문자 그대로, ‘평화를 이룩하는’)라는 형용사는 성경 이외의 문학에서는 많이 사용하지 않고, 성경(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도 여기에서만 나온다. 이 동사와 상응하는 표현은 그리스어 번역본 잠언 10,10에 나온다. 그곳에서 솔직하게 비판하는 사람은 평화(‘에이레노포이에이’)를 증진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3,18), 일곱째 행복선언에 가깝게, 정의의 열매를 평화를 위하여 몸 바치는 일과 연관시킨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어떤 성경 번역본들에서는 ‘평화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번역이 전통적인 것일 수는 있어도, 오해할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태평스런 사람들의 특징인 소극적인 태도 또는 무관심, 즉 남을 괴롭히지도 않고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으려는 태도를 암시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바라시지 않는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바라신다. 그것은 자연적인 기질, 느긋한 성격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으려 노력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실천하는 애덕을 가리킨다.

한편, ‘샬롬’(‘평화’)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원래 ‘온전함’이라는 관념에서 나온다. 그리고 온전함은 좋은 건강, 물질적・영적 번영, 개인과 사회의 안녕과 행복을 전제한다. 단순한 순조로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뜻하는 이 평화는 출중한 선으로서 하느님이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온갖 복을 요약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6)

마태오의 시각에서,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일의 첫 수혜자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상호 도움과 잘못에 대한 용서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참조 18장).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마태오는 원수에 대한 가장 작은 적의도 용납하지 않는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5,44-45)

다른 행복선언들에서처럼, 평화를 심는 사람들은 종말론적 미래의 초석을 놓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이 약속은 신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마지막 때가 지나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기에, 뒤로 밀쳐놓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있다(6,9). ‘불리다.’라는 수동태는 단순한 외적인 부름이 아니라, ‘존재’ 또는 ‘존재하게 됨’과 동격이다.

어떻게 보면, 이 행복선언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포하면서도, 미래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평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고 싸우는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는다. 그런 사람의 태도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맡기면서 이웃인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훨씬 높은 단계를 전제한다.

‘여덟째 행복선언’: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5,11) 이 행복선언은 하느님께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 충실함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 가장 훌륭한 귀감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충실한다 해서 비판과 모함과 고발과 사형을 받으셨다. 이 여덟째 행복선언은 첫째 행복선언과 똑같은 동기를 가지고 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를 약속받는다. 

‘아홉째 행복선언.’(5,11-12) 이 행복선언은 언뜻 보기에 앞 행복선언을 되풀이해 놓은 것 같다. 적어도 똑같은 생각을 보완하여 표현해 놓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의미 있는 여러 차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선, 양식(樣式)이 그 길이와 문체에서 앞 선언들과 다르다. 나머지 선언들의 특징적인 조건과 대비된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차이는 앞 선언들에서는 적극적으로 취하는 행동에 대하여 말하는 반면(예를 들어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여기에서는 ‘나 때문에’(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치다가’)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와 함께 지적할만한 점은 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건너간 사실과 명령형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11-12절)

박해에 대한 언급은 여덟째 행복선언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차이점은 앞 선언에서는 이미 시작된 박해에 대하여 말하지만, 이 행복선언에서는 장차 살아남을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따라서 이 행복선언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박해, 모욕, 모함에 용감하게 맞서라고 권고하고 있다.

12절 마지막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하늘로부터 땅으로 옮겨가게 한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행복선언들의 틀 안에서, 이 주장은 그리스도 때문에 희생과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초대는 행복선언 전체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늘에서 받을 큰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12절). 이 약속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관심을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행복선언들의 귀결문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행복선언들에서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 통치권을 행사하고 세워 가시는 하느님의 개입을 예고하지만, 그와 반대로, 여기에서는 약속된 보상이 인과응보 교리 안에서 자기 존재이유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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