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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익살과 유머, 여유" - 10.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08 조회수379 추천수6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0.7 수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요나4,1-11 루카11,1-4
                                                  
 
 
 
 
 
 
"하느님의 익살과 유머, 여유"
 
 


경향신문 63주년 창간 특집을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신문 1면에
“한국, 똑같은 풍경, 똑같은 일상, 한국인은 복제인간”이라는 제하에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인은 복제인간, 붕어빵 인생이다.
  도시도 축제도 소비도 얼굴도 판박이다.
  하루 일상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은 아파트 가득한 사진 밑에 있는 설명글입니다.
“불암산에서 내려다본 강북지역이
  똑같은 성냥갑을 쌓아놓은 듯한
  아파트 숲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있다.”

이래서
‘영혼이 없는 사회’,
‘영혼이 없는 집’,
‘영혼이 없는 얼굴의 사람들’이란 말이 회자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어느 분은 다음과 같은 원인과 대안을 이야기합니다.

“1960년대 이후
  압축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가치의 획일화가
  지금의 복제사회를 형성했다.
  지금의 복제사회는 좇으면 좇을수록,
  경쟁에서 탈락하는 누군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정글사회다.
  하여 새롭고 다양한 가치지향으로 복제사회를 넘어서야 한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똑같은 풍경, 똑같은 일상, 똑같은 붕어빵 인생의
복제사회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익살과 유머와 여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래야 똑같은 외적환경에서도
최대한 개성 있게, 내적 자유를 누리며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하느님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저는 1독서를 묵상하며 웃었습니다.
하느님은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습니다.
 
요나와 장난을 하며 순진한 요나를 놀리십니다.
 
또 요나는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적나라하게 자기 치부를 드러냅니다.
 
그대로 우리의 양면성을 보는 듯합니다.
 
회개를 선포한 후
니네베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하느님께 화를 냅니다.
 
이 또한 기도입니다.
 
거룩한 기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모든 쓰레기를 그대로 쏟아 놓는 기도 역시
다 경청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심으로 니네베가 보기 좋게 망하는 꼴을 기대했는데
이게 이루어지지 않자 온갖 투정을 늘어놓는 요나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하느님이시지만
요나는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의 기도 다음에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요나가 꼭 어머니에게 억지 부리며 떼쓰는 아기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와 싸우는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요나를 달래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전 어머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싸우면 똑같은 사람이 된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바로 이런 진리를 그대로 실천하시는 요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정말 훌륭하고 지혜로운 어른들
자식들이나 수하 사람들과 절대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면 똑같은 사람이 되고 권위도 저절로 실추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겨본들 남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이어 말로 싸우시면 요나를 이길 가망이 없자
하느님은 아주 익살스럽게 여유 있게
아주까리를 이용하여 요나를 순복(順服)시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느냐?”(요나4,10-11).
요나를 달래는 하느님의 모습이 꼭 루카 복음 15장의
맏아들을 달래는 자비하신 아버지(루카15,31-32)를 닮았습니다.
 
요나의 모습은 바로 편협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과 인간의 편협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듣고 요나는 부끄러움에 깊이 뉘우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복제사회를 넘어
내적 자유를 누리며 아름답고 행복하게 참 나를 살 수 있을까요?
 
요나서의 하느님의 익살과 유머, 여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체화(體化)하면서
하느님을 닮아 갈수록 개성 뚜렷하고 자유로운 ‘참 나’의 삶입니다.
 
주님의 기도 중 ‘아버지’로 시작되는 호칭에서
문득 루카 복음15장의 아버지 앞에서 뉘우치는 작은 아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이런 작은 아들처럼
참으로 비워지고 낮아진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르며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도록,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우리가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 하시도록,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동시에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 이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미사가
하루 전 삶으로 확산되도록 노력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복제사회에서 붕어빵 복제인간이 되지 않고
아름답고 자유롭게 개성 뚜렷한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복제사회를 넘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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