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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이 사람이 되심>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2 조회수513 추천수0 반대(0) 신고
 

<말씀이 사람이 되심>(요한 1,14).

 

*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권력과 세력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내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히브 2,17)

메시아가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력과 세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인류는 이기심과 재물욕과 명성욕과 권력욕으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인간이 약하고 불완전한데도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메시아는 가난과 억압과 착취와 박해와 죽음이 무엇인지를 몸소 겪은 체험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인간을 그 뿌리에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고 인간에게 하느님의 생명인 사랑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오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선택하여 돌 같은 우리 마음을 변형시켜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난한 사람들’의 기다림과 기대에 따라서 메시아는 당신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한 사람이 되시고 그들과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운명을 함께 나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예수께서 당신 형제자매인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에 동참하신 사실이야말로 인간과 인류를 구원하고 온전히 성장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됩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비참한 생활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함께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네 형제자매의 사랑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의 사랑은 위로부터 강요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한데 뭉쳐 손에 손을 맞잡고 아래로부터 밀고 올라와야 이루어집니다. 형제자매의 사랑이 자라면 그 외 모든 것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오직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출발해야만 온 세계와 인류 전체의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난은 악입니다. 가난을 없애는 길은 몇 안 되는 사람들과 나라들만 이기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좀 느릴지라도 절대다수 사람들과 나라들이 함께 발전하도록 꾀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단결과 노력과 몸바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십니다.

 

* 예수께서는 말구유에서 아주 비참하게 태어나십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었던 것입니다(루가 2,7).

 

 

예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가난한 사람들이 견디는 빈곤과 천대를 당신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궁핍과 천대는 부유한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과 공명심의 결과입니다.

 

예수의 가족은 노동자 계급에 속합니다. 예수의 손바닥과 손마디는 곧 힘든 노동으로 굳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시골 목수로서 의자와 탁자와 가구를 만들고 기타 온갖 허드렛일을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노동으로 백성을 섬기십니다.

노동자나 농부가 그리스도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의 얼굴은 틀림없이 땀에 젖어 있었고 햇볕에 그을려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던 집도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과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수시던 음식, 입으시던 옷도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과 옷이나 같았을 것입니다.

노동자나 농부가 예수 어머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으면 자기네 어머니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의 어머니도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노동자나 농부가 예수의 희로애락을 알고 싶으면 자기네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이 피로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일에 쫓겨 아침 일찍 일어났을 것이고 일이 없을 적에는 일감을 찾으려고 마음졸이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느꼈으며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사랑이 예수의 일생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 30년 후에 예수께서는 설교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예수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에 못 이겨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를 부자들은 날카롭게 지켜보았으며 가난한 사람들도 예수께 관심을 쏟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수의 아들이요 그 자신이 목수가 아닙니까!(요한 6,42) 가난뱅이 예수가 어떻게 감히 제멋대로 생각하고 말할 권리가 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여러 읍내를 돌아다니십니다. 그러면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돌아다니면서 피로와 갈증을 느끼십니다(요한 4,6-7). 예수께서는 허기진 군중이 안타깝고(마태 15,32), 자기 조국의 어두운 장래가 걱정스러우십니다(루가 19,41). 예수께는 가난한 사람들의 온갖 질병이 당신 자신 몸의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생애를 마치실 적에는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들’에게서 떠밀리고 오해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십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마태 8,17)

예수처럼 우리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함께 단결하여 일어서기 위하여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벗어나 모든 사람 온 인류를 하나로 만들어가는 길, 곧 해방투쟁의 길을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넘치는 새로운 사회와 세계, 곧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면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처럼 깨어 목숨을 걸어 놓고 싸워야 합니다.

 

묵상과 대화


1. ‘육화’(말씀이 사람이 되심)란 무슨 뜻입니까?(필립 2,6-7; 히브 2,17; 2고린 8,9 참조)

2. 육화의 신비가 지닌 참된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야말로 해방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3.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세계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4.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네 비참한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우리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합니까?

5.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가난하게 태어나고 가난하게 살고 가난하게 알몸뚱이로 죽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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