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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자유>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6 조회수38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자유>

 

* 모든 사람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삼십 년 동안 나자렛이라는 읍내에 숨어살면서 형제자매의 사랑을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엿한 노동자 목수로 자리를 굳힌 다음에 비로소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내보이십니다. 어느 축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낭독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방금 읽은 말씀이 당신을 두고 한 말씀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4,18-21)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예수 고향 사람들은 당신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자기네 동료요 자기들과 똑같은 노동자가 그런 엄청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께서 목수 요셉의 아들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들 사이에서도 가끔 일어납니다. 만일 박사가 우리에게 말을 하면 우리는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노동자나 농민이 해방에 대하여 말하면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거나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께 그 고향 사람들이 한 짓을 가끔 하려 합니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정말 형제자매로 살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만일 자기네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형제자매들로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얻어 자기들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끊어 버리는 일에 관하여 함께 토론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눈을 크게 떠야 하고, 하느님 계획의 빛 안에서 따라야 할 길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재화를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공평하게 나누도록 만들 때, 그 때에야 가난한 사람들은 진정한 형제자매 사랑에 대하여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야 한다고 말하고 예수께서는 속박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께서는 결국 같은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께서 모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뒤 선포된 맨 첫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루가 2,10-11)

그리고 목동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거짓 구세주가 많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구세주를 알아볼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일러 줍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루가 2,12) 예수의 가난한 모습이 예수를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자로 알아보게 해 주는 표라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참된 메시아인지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가서 당신이 메시아인지 묻자 예수께서는 나자렛에서 해 주신 것과 똑같은 답변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체적인 답변을 주십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루가 7,22)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는 이 기쁜 소식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표지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증거해 보이기 위하여 그 구체적인 표지를 보여 주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이 그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그 표지는 예수추종자들과 예수추종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참된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 표지는 반드시 박해와 수난과 피흘림을 요구할 것입니다.

 

* 억압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이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해방을 가져다 주십니까?

 

예수께서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온갖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즉 무지와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과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의와 증오에서 해방시키려고 오신 것입니다. 불의와 증오는 인간이 타인을 형제자매로 사랑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챙기고 명성을 뒤쫓는 인생을 살 때 생깁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온갖 종류의 속박에서, 온갖 종류의 눈멀음에서, 온갖 종류의 개인이기주의에서, 온갖 종류의 집단이기주의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회·정치 구조를

바꾸어 놓으려고 애쓰셨습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께서 사회구조를 바꾸어 놓기 위해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다는 식의 암시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속의 잘못입니다. 이 잘못은 일정한 선입견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심각하게 비뚤어지게 합니다. 예수의 요구는 결코 개인적인 회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각 개인이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개인들이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바꾸는 이유와 목적은 모든 인간이 한 혈육과 한 형제자매로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는 사회와 세계 곧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예수께서 하신 설교의 핵심이라면, 형제자매의 사랑이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정치 구조를 바꾸어 놓으려고 예수께서 노력하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당신 표양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방법을 이론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방법을 더 이상 설명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구조변혁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성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 순전히 정치적인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자기네 정치의 이해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네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그렇게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많은 신경을 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잘못 이끌고 날마다 억누르고 있는 장본인들이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임을 곧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침내 로마인들의 앞잡이 구실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못살게 구는 사두가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맞서셨습니다. 사실상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못살게 구는 정치구조란 유다교의 신정정치 구조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있던 그런 종교·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싸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백성을 지배하고 착취하던 그런 구조를 바꾸어 놓으려고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위험한 혁명가로 보았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예수께서 그 때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맞서 어떻게 싸우셨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때의 사회 또는 종교의 불의와 구조악을 목숨을 걸고 폭로하며 회개를 재촉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박해를 당하고 사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투쟁에서 지키셨던 정신과 행동은 당신 추종자들의 정신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때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우리 가난한 사람들도 우리 시대와 장소에 맞추어 적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조변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전언에서 사회변혁과 구조변혁은 오직 모든 인간이 더욱 인간답고 형제자매가 되는 환경을 만드는 수단일 따름입니다.

 

묵상과 대화


1. 예수께서는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 보이셨습니까? 그리고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왜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까?

2. 예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해방을 가져다 주십니까?

3. 예수께서는 소경에게 어떤 종류의 빛을 주십니까?

4. 왜 예수께서는 로마인들을 직접 치지 않으셨습니까?

5. 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 및 바리사이들과 그렇듯 심하게 다투셨습니까?

6. 예수께서는 당시의 억압구조와 착취구조에 맞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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