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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교란 낯선 곳에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조혜인 신부 인터뷰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6 조회수512 추천수2 반대(0) 신고
 
선교란 낯선 곳에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
[인터뷰] 조해인 신부 "선교지에서 오히려 배우는 선교사"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영적 도전이다"
 
2009년 10월 16일 (금) 11:39:01 한상봉 isihan@nahnews.net
 

 

   
▲의정부 이주노동상담소가 있는 녹양성당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제83차 전교 주일(2009.10.18.) 담화를 통해 "교회는 세력을 넓히거나 지배권을 주장하고자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세상의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활동합니다. 우리는 온 인류를 위하여, 특히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강력히 선포했다. 즉 교회의 복음선포 사명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것이다. 

 

전교주일을 맞으면서 의정부 이주노동자 상담소의 조해인 신부(의정부교구)를 만나보았다. 조해인 신부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메리놀외방선교회의 협력사제로 캄보디아에 파견되어 에이즈 환자들과 살았으며, 지금은 의정부 녹양동성당 안에 위치한 이주노동자 상담소에서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조해인 신부는 본래 서울대교구 소속이었으며, 2002년 캄보디아에 파견되기 전까지, 서울대교구의 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하다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의뢰하여 6개월 동안 사전 교육을 받았다. 메리놀선교회 본부에 기거하면서 언어교육을 받고, 그해 겨울엔 3주 동안 캄보디아를 사전 방문해서 분위기를 익혔다. 

캄보디아는 1천3백만 인구 중에 3만 명 정도가 가톨릭신자이며, 구중에서 대부분인 2/3가량은 베트남계다. 이들은 대개 캄보디아에서 부유한 층에 속하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식민정부는 베트남 사람들을 통해 캄보디아 인민을 통치했던 탓이다. 캄보디아는 대체로 정국이 불안정한 나라인데, 독립 후에도 중국모델을 따르는 폴포트 독재정권이 다스렸으며, 오랫동안 내전에 휩싸이고, 1998년이 되어서야 훈센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비교적 안정을 누리고 있다. 

공식적인 종교는 불교여서 가톨릭 선교사들은 NGO자격으로 캄보디아에서 활동한다. 가톨릭교회는 현재 프놈펜 등 세 개 교구가 있으며 주교는 한 명인데, 공식적으로는 캄보디아 카리타스 의장으로 있다. 이들은 정부의 묵인아래서 종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파리외방전교회 등이 본당을 맡고, 예수회와 메리놀외방선교회 등은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및 에이즈 환자 돌봄 활동을 하고 있다. 

조해인 신부는 캄보디아 교회가 완전한 토착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즉, 캄보디아식 교회를 추구하는 것인데, 전례와 예술을 고유문화에 맞추고, 성가도 전통적 음율로 부르며, 성화도 마찬가지다. 베트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미사 역시 캄보디아 말로 봉헌된다. 사제들은 본토인들이 5명 가량 있고, 나머지 50여 명은 선교사들이다.

 

   
▲사실상 그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배우게 된다는 조해인 신부.

 

조해인 신부는 서울대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세번째 본당을 전전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본당에 비해 사제 숫자가 넘쳐나 주임사제로 발령받으려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군종사제를 자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조 신부는 "(형제인) 조해붕 신부가 베트남 선교를 다녀오면서 해외선교사로 가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캄보디아에 갔을 때, 메리놀 선교사들은 '안전'을 생각해서 본부건물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조해인 신부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미국식 생활방식이 불편했고, 제대로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도 현지인들과 더 깊이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언어공부를 하는 기간동안 메리놀에 청해서 캄보디아인의 집에서 하숙을 할 수 있었다. 식구가 12명이나 되는 가정이었는데, 학원에 다녀오면 길가에 그들과 앉아서 거리구경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그 집 아이의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조해인 신부에게 낯선 공간이었다. 

"나를 던져본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교회 안에서 사제들은 자신을 완전히 던질 수 없게 하죠.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여서 사제들은 어디서나 대접받는 위치에 있는 거죠. 그래서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선교사들은 사제로서 사는 게 아니다. 조 신부가 3년 동안 주로 일했던 프놈펜 외곽 마을에는 가톨릭신자들이 없었으며, 그들은 가톨릭 자체를 잘 모르고, 선교사들은 그저 자신들을 도우러 온 '외국인'일 뿐이다. 캄보디아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생각했던 것은 현실과 마주치면서 계속 엇나갔다. 

 

   
▲조해인 신부는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상담을 전담하고 있는 형편이다. 캄보디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국내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그들에게 동화되리라고 생각했는 데 그렇지 않더군요. 그들은 여전히 불편하고, 내 안에서 계속 갈등이 생기더라구요. 외국인이 아무리 한국말을 잘 하고 김치찌개를 잘 먹더라도 여전히 한국인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거지요. 나는 처음에 투신하면서 내가 캄보디아 사람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가능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죠. 서로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는 거죠. 서로 다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게 중요하죠."

 

조해인 신부는 "그저 다 같은 사람이니까, 그 선에서 나눌 수 있는 게 있었다"고 하면서 "내가 그 사람들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얻었다"고 말했다. 그저 주는 데만 열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하는 제 모습을 확인하고 깨지면서 '자신의 실상'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해인 신부는 협력사제로 캄보디아에서 지내기로 약속한 기간이 만료되는 2005년 경부터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에 고용허가제를 통해 2천여 명의 캄보디아 사람들이 이미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조 신부는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2004년 서울대교구 분할 때 의정부교구를 선택했다. 의정부교구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일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조해인 신부는 귀국해서 의정부교구 교구청 기획실에서 일했는데, 마침 2000년부터 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 운영하던 이주노동자 상담소가 2006년에 함 패트릭 신부가 안식년으로 그만 두게 되면서 교구로 넘어오고, 조 신부가 자청해서 그리로 가게 되었다. 그전부터 조 신부는 이 상담소에 간간이 와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한글교실 등을 하곤 했는데, 주교 역시 이를 알고 있던 차라 일이 쉽게 추진되었다. 

의정부 이주노동자상담소에서는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임금문제를 많이 다루고, 사업장 환경과 관련된 사안, 그리고 행정절차를 도와준다. 조해인 신부는 "이러한 활동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어서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풀어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당장의 필요에 응답할 핑요는 있다"고 말했다.

조해인 신부는 캄보디아에서는 자신이 비주류에 속하면서 그들을 도왔지만, 이제는 한국인으로서 주류사회에 속하면서 그들을 돕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여기서 오는 영적 도전이 있다고 말한다.

상담소 차원에서 매년 바자회를 여는데, 사제관에서 내놓을 물건을 정리하다가 "이건 주기 아까운데..."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는 것이다. 이때마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어떤 옷은 "이 사람들이 입기에  너무 좋은 것 아냐"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면, 이미 자신이 그들을 누군가보다 못한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깨달음이다. 

 

   
▲이주노동자들을위해 상담소 한쪽에 켜켜이 쌓아놓은 옷.

결국 이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도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까지만..." 이라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차별주의, 이기심 등. 결국 조 신부는 이주노동자 사목을 통해 '자기를 보는데' 더 흥미를 가진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도전받고, 내 사랑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들 역시 내게 사목하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도록 채근한다면, 그들은 내게 '사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목하면서 사목당한다고 할까. 결국 "그들을 통해 내가 구원되는 것을 경험하는 게 선교'라고 조 신부는 말한다.

한편 이주노동자 사목을 하면서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사제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 신앙인인 사제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고용된 이주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한다고 한다. 욕이 다반사인 노동환경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생활하고 있으며,  이런 모습을 사제들 역시 '무의식 안에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해외에 나가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선교하는 것이나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는 것이나, 우리보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선교사/사제들에게 영적 도전이다. 나 자신의 사랑을 점검해보라는 전갈이며,  우리 한테 익숙한 인종주의와 편견에서 해방되라고 요구하는 복음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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