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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 18일 야곱의 우물- 마르 10,35-45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8 조회수368 추천수1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 예고하시고 (마르 10, 32 – 34) 난 다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었다.” (1, 20) 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아버지 제베대오는 아마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제베대오 집안에서 물질적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늘 복음의 병행 본문 마태 20, 20 - 28 에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대신에 그 어머니가 전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오복음에서 그들의 어머니가 와서 아들들을 위해 청을 드리는 것은 사도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그런 청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조만간 메시아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가 오면 가장 높은 명예와 권위 있는 자리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청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마르 10, 37) 곧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앉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 집안의 경제력으로 물질적 도움을 받았고 자신들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충실하게 따르던 믿을 만한 제자이니, 앞으로 예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때 자기들이 중책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고 계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받게 될 수난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는데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38절ㄱ) 그들의 야망에 찬 요구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수의 신비, 곧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겪어야 할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만 집착하는 두 제자에게 그 영광에 이르는 데 따르는 고통과 수난의 길을 언급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38절ㄴ) 예수님의 이 질문에는 그들이 ‘할 수 없다.’ 는 부정적 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적에도 야고보와 요한은 여전히 자기들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곧바로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겪을 전쟁을 언급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도 언젠가는, 곧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그들만 지상에 남겨져 ‘예수 그리스도’ 를 선포하게 될 때 그들도 예수님이 당한 수난과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또 한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0절) 그런 일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달린 것이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묵묵히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를 것을 가르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 이외의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간 다음에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언짢게 여겼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전에도 누가 더 높으냐는 서열 문제로 논쟁을 벌였듯이 (마르 9, 33 - 37)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왕국이 실현될 때 그들 또한 높은 자리를 기대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제자들 사이의 불화와 경쟁심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 ‘다스림’ 과 ‘섬김’ 을 대조시켜 설명하십니다. 세상 통치자들은 백성을 지배하고 억누르고 힘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세상 통치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 ( 디아코노스)’ 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 ( 둘로스)’ 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곧 다른 사람의 삶에 도움을 주고, 하느님께 매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겸손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내 목숨을 바치러 왔다.” (45절) 그분은 이 말씀처럼 사셨고 또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의 섬김과 희생의 삶을 거울로 삼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뒤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그들의 어머니도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의 장소에 함께하고 있습니다.(마태 27, 56)

“ …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위로함으로써 위로받고 이해함으로써 이해받고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중에서)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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