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 [복음과 묵상] | |||
---|---|---|---|---|
작성자장병찬 | 작성일2009-10-19 | 조회수48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1. 생 애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안티오키아 교회의 2대(혹은 3대) 주교로서 110년에 로마의 꼴로세움(원형극장)에서 맹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고를 받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7개의 서간을 쓰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도시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게 된 곳이며(사도 11,26),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출발하였던 선교의 중심지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부터 안티오키아 교회와 로마 교회는 초대교회 안에 두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간다는 소식은 전 교회의 슬픔이었다. 순교지를 향한 그의 여정이 스미르나에 도달하였을 때에 에페소, 마네시아, 뜨랄리아 교회 등에서 보내온 위문 사절단과 만나게 되었다. 이냐시오는 이곳에서 자기에게 사절단을 보낸 세 교회에게 감사의 마음이 담긴 권고의 편지를 각각 보내고, 순교를 당하게 될 로마 교회에도 편지를 보낸다. 다시 뜨로아스에 와서는 안티오키아에 박해가 멎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필라델피아 교회와 스미르나의 주교인 뽈리까르뽀에게 편지를 보낸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해서는 우리가 고전영화 쿼바디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맹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후에 신자들이 그의 유해를 안티오키아로 옮겨 안장하였다. 교회는 그의 순교일에 따라 10월 17일에 축일을 지낸다.
2. 일곱 서간 이냐시오가 보낸 7개의 서간들 중에서 6개는 교회 공동체(에페소, 마네시아, 뜨랄리아, 로마, 스미르나, 필라델피아)에 보낸 것이고, 1개는 뽈리까르뽀 주교 개인에게 보낸 것이다. 뽈리까르뽀 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선배 주교로서 후배 젊은 주교에게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고,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 외에 다른 5개 교회 공동체에 보낸 서간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 일치하고 교회의 장상들에게 순명하며, 그릇된 이단들에 조심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 특기할 점은 이냐시오가 최초로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일컬어 “가톨릭 교회”(스미 8,2)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가톨릭”이란 단어는 ‘보편적’이란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 안에는 반드시 주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은 다른 여섯 서간과 성격을 달리한다. 이 서간에는 교회 장상들에 대한 순명의 권고나, 이단에 대한 경고가 없는 대신 이냐시오 자신의 신앙 자세와 주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승화된 인간의 신비적인 면을 감동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서간은 신학전망 24호(1974년 봄)에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냐시오의 서간들은 평상시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순교지로 가는 여정에서 쓴 것들이기에 그 호소력이 강하며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매우 크다. 사실 이냐시오가 순교한 후에 편지를 받은 각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이 편지들을 서로 돌려가며 보거나 복사하여 보관하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 널리 유포되었다.
3. 순교영성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 주교가 지녔던 순교에 대한 열망은 여러 서간에 나타나 있다.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께 대한 불붙는 사랑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 왜 내가 목숨을 바치려는 것입니까? --- 내가 맹수들 가까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는데 완전한 인간이 되신 그분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주교가 로마로 압송되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로마교회는 휼륭한 지도자를 구해내기 위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냐시오 주교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기를 위한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아무것도 내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을 질투해서 방해하지 말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일 침묵을 지켜준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나의 육신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또 다시 달음질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나를 위해 하지 마십시요. 제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4. 순교와 성체 신비 이냐시오가 자신의 순교를 성체의 신비와 연결시킨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자신의 순교를 성체신비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맹수들이 자기 몸을 깡그리 먹어치워 장사지낼 수고까지 없애주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당신의 목과 피를 인류 구원을 위해 내어 놓으셨고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다. 자기 몸이 사자의 이빨에 짖이겨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겠는데, 이냐시오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어떻게 이처럼 담담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평소에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를 너무나 잘 깨닫고 묵상하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순교가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보고 있는것이다.
[10월 20일] 생명의 말씀 '복음' <루카 12,35-38>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의 묵상]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복음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동한 주인이 종을 챙겨 준다는 내용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주인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깨어 있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내 뜻과 다를 경우,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비탈에서도 잘 삽니다. 뿌리가 강한 탓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시 변덕이 심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소나무처럼 언제라도 ‘푸른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