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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의 눈으로/올바른 선택을 하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1 조회수366 추천수1 반대(0) 신고
 
올바른 선택을 하라

훌륭한 정신과 의사인 칼 매닝거는
「죄는 무엇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의식을 상실했다고 썼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죄의 현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얘기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사실일까? 사람들은 아직도 죄의식을 느끼는가,
 아니면 우리는 참다운 죄의식을
우리의 어휘와 존재로부터 추방해 버린 것일까?

먼저 우리는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한다. 죄란 무엇인가?
한가지는 분명하다. 죄는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이익을 제공해 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상당한 돈이 든 당신의 지갑을 주웠다고 가정하자.
당신의 주소와 이름도 그곳에 들어 있다.

내 마음은 두 가지 선택이 있고,
그 두 가지 모두에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지갑을 돌려 줄 수 있다. 그것은 옳은 일이고 정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는 기분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그 지갑과 돈을 그냥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큰 이익이 된다.
나는 그 돈으로 온갖 물건들을 다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유혹'이라는 상황 속에 있으며, 미덕과 악덕의 중간에 서있다.
자유의지는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마음의 초점을 모을 수가 있다.
지갑을 돌려주는 쪽을 선택한다면, 나는 미덕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 의지가 유혹에 굴복하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잡는다면,
그것은 또한 나쁜 선택을 합리화하도록 마음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아무도 악을 악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로빈 후드가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부자에게서 훔친 것을 생각해 낸다.
나는 지갑을 보고 당신을 부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난하다.
얼마 뒤에 나는 자신을 로빈 후드라고 합리화한다.
이제 나는 당신의 돈을 챙길 수가 있고,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이 부도덕한 행동의 코스를 선택한다면,
 나는 민감한 양심에 따라 비난받을 것이다.
내 마음은 자신의 합리화를 소화해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두 번재 기회를 갖거나,
자신의 합리화를 강화하려고 할 것이다.
두 번째를 선택했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당신이 지갑을 함부로 두니까 그렇지요."
혹은 "당신도 내 지갑을 주우면 안 돌려 줄거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의 지갑을 돌려주겠소?"
결국 나는 자신의 죄의식을 억눌러,
무의식적인 마음 속에 집어처넣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은 그 속에서조차 활동하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성은 우리가 죄의식을 묵살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잠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적인 죄가 있는 경우,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죄악감은 건전하고 희망적인 반응이다.
"고백은 영혼을 위해서도 좋다."는 말도 있다.
그것은 합리화의 고된 작업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오." 했을 때
나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마련해 둔
 평화를 체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직성은 드물다.
어렸을 때,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성장한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을 만났을 때,
그것을 하와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하와는 뱀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겼다.
우리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다면,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정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제스처 게임(몸짓놀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서를
조심스럽게 읽으면서 예수님이 항상 죄인에 대하여
친절하고 이해심을 나타낸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처음에 불렀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에게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과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친구는 막달레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일곱 마귀를 쫒아내 주셨다.
착한 도둑은 평생에 꼭 한 번 기도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죄목이 써 있는 명패를 보았다.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죽어가는 도둑은 호소하는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당신의 왕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곳에 들어갈 때,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 불쌍한 사나이는 약속을 받았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를 다룬
 비유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비유는 "잃었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아버지가 길가로 뛰어나와
우리를 부둥켜안는 장면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그때 우리는 말한다.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사랑의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따위의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 지음 / 정성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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