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의 눈으로/올바른 선택을 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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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09-10-21 | 조회수39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훌륭한 정신과 의사인 칼 매닝거는 그 책에서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의식을 상실했다고 썼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죄의 현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 말은 사실일까? 사람들은 아직도 죄의식을 느끼는가, 우리의 어휘와 존재로부터 추방해 버린 것일까? 먼저 우리는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한다. 죄란 무엇인가? 한가지는 분명하다. 죄는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이익을 제공해 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상당한 돈이 든 당신의 지갑을 주웠다고 가정하자. 내 마음은 두 가지 선택이 있고, 나는 지갑을 돌려 줄 수 있다. 그것은 옳은 일이고 정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는 기분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그 지갑과 돈을 그냥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큰 이익이 된다. 나는 그 돈으로 온갖 물건들을 다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유혹'이라는 상황 속에 있으며, 미덕과 악덕의 중간에 서있다. 자유의지는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마음의 초점을 모을 수가 있다. 지갑을 돌려주는 쪽을 선택한다면, 나는 미덕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 의지가 유혹에 굴복하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잡는다면, 그래서 나는 로빈 후드가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나는 지갑을 보고 당신을 부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난하다. 얼마 뒤에 나는 자신을 로빈 후드라고 합리화한다. 이제 나는 당신의 돈을 챙길 수가 있고, 이 부도덕한 행동의 코스를 선택한다면, 내 마음은 자신의 합리화를 소화해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두 번재 기회를 갖거나, "당신이 지갑을 함부로 두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의 지갑을 돌려주겠소?" 결국 나는 자신의 죄의식을 억눌러, 그러나 죄의식은 그 속에서조차 활동하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성은 우리가 죄의식을 묵살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잠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실제적인 죄가 있는 경우, "고백은 영혼을 위해서도 좋다."는 말도 있다. 그것은 합리화의 고된 작업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다.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나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마련해 둔 그러나 그러한 정직성은 드물다. 어렸을 때,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을 만났을 때, 하와는 뱀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겼다. 우리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다면, 우리 인생은 제스처 게임(몸짓놀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서를 친절하고 이해심을 나타낸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처음에 불렀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에게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친구는 막달레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일곱 마귀를 쫒아내 주셨다. 그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죄목이 써 있는 명패를 보았다.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죽어가는 도둑은 호소하는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당신의 왕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곳에 들어갈 때, 그 불쌍한 사나이는 약속을 받았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를 다룬 그 비유는 "잃었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아버지가 길가로 뛰어나와 그때 우리는 말한다.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따위의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 지음 / 정성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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