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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신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2 조회수397 추천수6 반대(0) 신고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신다? - 윤경재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49-53)

 

이 대목을 묵상할 때 흔히 종교 간의 갈등을 들어 해설하곤 합니다. 현재 세계는 다종교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거의 세계 모든 종교가 들어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교 백화점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한집안 안에서 여러 종교를 믿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면서도 종교 간의 갈등이 심하지 않은 몇 되지 않는 나라에 속합니다. 세계 다른 나라에 눈을 돌려보면 불행하게도 갈등을 넘어서 가혹한 전쟁에까지 치닫는 나라가 많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아무 이유 없이 서로 증오하고 살상합니다. 이 세상에 그런 원수가 다시없다는 식으로 미워합니다. 한 번도 서로 마주치거나 해를 끼친 적이 없지만, 무턱대고 증오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할까 염려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외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 말씀을 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내면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믿음의 본질을 강조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다수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더 나은 현세를 위해서, 행복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막상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뜻밖의 경우를 당하는 적이 잦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 사고가 벌어져 갈등하게 됩니다. 공연히 종교에 들어왔다고 후회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일은 도박꾼이 도박장에 가기 전에 돈을 따게 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일과 같습니다. 돈을 따게 되면 커다란 재물을 바치겠다고 신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돈을 잃게 되면 화를 내며 신상이나 부적을 쪼개어 버립니다. 

시몬 베이유는 “종교가 위안의 근원인 한, 종교는 참된 신앙을 가로막는다. 이런 의미에서 무신론은 참 신앙에 정화 효과가 있다. 나는 하느님에게 기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일부에 대해서는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 피상적인 부분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신론은 오히려 옳고 종교인은 틀렸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아는 자매님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며 봉사활동도 게으름 피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대에 다니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그만 명을 달리했습니다. 평소에 엄마 말을 잘 듣고 매사에 알아서 척척 해나가는 건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딸을 둔 자매님들이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여 은근히 줄을 대는 처지였습니다. 집안 좋고 잘생기고 성격 좋은데다 같은 교우이니 얼마나 신뢰가 갔겠습니까. 

그런 아들이 죽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했습니다. 수녀님과 구역 식구들이 찾아왔던 초기에 잠시 위로받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가자 사람들 방문도 사양하고 오랫동안 성당에도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했습니다. 하도 말 붙이기 어려워 함부로 위로의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갈등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었습니다. 평소에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자발적으로 연미사와 생미사도 올려주고 남몰래 묵주기도도 많이 드렸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망하며 하느님께 매일 따지고 물었다고 합니다. 욥기도 읽어보고 기도도 해보았지만,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남들이 고통을 당할 때 앞장서서 위로해 주었지만, 그때 자신이 얼마나 위선자이었든가 새삼 깨달았다고 합니다. 신앙을 이러쿵저러쿵 하고 떠들어댔던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신앙을 머릿속에서 계산하며 이해하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얄팍했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한 반년쯤 지난 어느 날 그 자매는 울면서 묵주기도를 드리다가 지쳐 쪽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남이섬 강가에서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물장구를 치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들이 안 보이고, 저쪽에 왁자지껄한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이 물에 빠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서럽고 놀라서 물가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데, 얼마 후에 성모님께서 아들을 안고 나타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아들은 내가 안전하게 구했고 데려가 잘 기를 터이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시더랍니다. 하도 생생하고 놀라서 깨어보니 그만 꿈이더랍니다. 

다시금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한 글자 한 글자 의미를 묵상해가며 읊조리며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대목에 가서 덜컥하고 걸리는 것을 느꼈답니다. ‘아버지의 뜻’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내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하는 자각에 미쳤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심은 다만 우리의 자아를 굴복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세상과 적대하는 대신에 친하게 지내며 자신이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예수께서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신다는 말씀은 바로 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야기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물은 마찰이 일어날 때 불이 지펴집니다. 원시인이 불을 지피는 것도 나뭇가지를 비벼서 일으킵니다. 부싯돌이 불을 내는 것도 마찰에 의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서 마찰을 일으키시려고 계획하십니다. 간혹 그 마찰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마찰을 못마땅해 하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곁에서 끝내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 이야기는 인간의 이런 상황을 설명해줍니다.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밤새 하느님을 부둥켜안고 씨름했었고, 종당에는 환도뼈를 상하는 처지에 당했지만 결국 축복을 받아냈듯이 인간의 처지는 하느님과 씨름하면서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씨름은 그가 손을 놓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도 놓아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의지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말씀으로 설명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행복과 불행은 인간적 관점에서 수긍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손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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