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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빛의 삶으로의 절실함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5 조회수1,132 추천수18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 30 주일 - 빛의 삶으로의 절실함

 


 

 요즘 기도가 형식적이 되고 절실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절실하게 기도하면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싸우실 때 서로 화해하시고 싸우시지 않도록 절실하게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싸우실 때도 있으셨지만 지금은 참 보기 좋은 모습으로 사십니다.

또 가장 절실하게 기도했을 때는 아마도 대학 시험을 보고 저의 친구는 붙었다는 통지를 먼저 받았는데 아직 저에게는 소식이 없을 때였습니다. 시골에서 친구라고는 그 친구와 저 뿐이었는데 그 친구는 붙고 저는 떨어진다면 부모님께도 큰 불효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 한 다음 날 저도 대학교에 붙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군대에 갔을 때였는데 저는 운전병을 하였었습니다.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사고를 내게 되었는데 사고를 낸 그때처럼 절실하게 기도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물어주면 그만이긴 하지만 사람의 몸에 금이라도 간다면 훨씬 복잡해지고 돈도 집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며 제발 앰뷸런스에 실려 간 사람이 뼈는 상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어서 어머님이 가져오신 돈으로 해결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절실한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절실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한 것은 다 들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또 큰일을 앞두고는 절실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요즘 김연아 선수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있습니다. 김연아는 허리를 치료받으면서 그 의사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어 그 이후엔 언제나 묵주반지를 끼고 경기에 출전합니다. 사실 교리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주일에도 미사에 가기 어려울 텐데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성호를 긋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온 기대를 안고 있는 부담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만큼 김연아 선수의 성호와 묵주반지는 그녀가 절실한 심정으로 하는 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태리 북부 어떤 산 위에서 발현한 성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언제나 나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눈먼 거지가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을 듣습니다.

거지가 눈을 뜨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 ‘절실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경은 다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만 듣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꾸지람도 들었겠지만 이 소경의 절실함은 모든 방해를 이겨내고 결국 예수님의 귀에까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목소리가 울리게 만듭니다. 세상의 온갖 잡음소리를 뚫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결국 기적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만듭니다.

만약 소경이 작은 소리로, 들리면 들리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청원을 드렸다면 예수님이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이의 청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들어주신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기도를 할 때는 절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절실하다는 의미는 그만큼 자신의 처지가 급박하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그 처지의 절실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오늘의 소경처럼 장님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장님이야?’ 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눈먼 소경을 고쳐주고 자신들이 장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41)

정말 눈먼 장님들은 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앞에 메시아가 있고 그들에게 말을 하고 기적을 행하는 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눈을 떠야 하는 것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죽음에 직면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그리 절박한 것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깨달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소경의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그렇게 눈이 멀어버렸을까요? 그 해답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시대로 올라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을 때는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나서야 하느님께서 “아담아!,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셨습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그들이 죄를 짓는 동안 그들에게서 떠나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이 하느님의 집인데 하느님께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위해서 스스로 눈을 감아 하느님을 보지 않은 것이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셔서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이미 하느님을 보지 않고 여자는 유혹자를, 남자는 여자만을 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죄는 어두운 밤이나 혼자 있을 때 저질러집니다. 온 사람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짓고 살기 위해서, 즉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스스로 장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장님이 되어 피해보는 것은 결국 자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고통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두려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놀이동산에 가서 귀신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무섭게 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어두워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홀로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음향 효과와 시각효과 거기에다가 무엇으로 다리라도 건드리면 놀라 자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이 환히 밝은 대낮에, 혹은 많은 사람이 뭉쳐 다니는데서 했다고 해 보십시오. 아무도 안 놀랍니다. 다들 유치하게 색칠한 마네킹과 장난감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장님이 되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홀로 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철모르고 날뛸 때는 부모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움츠려들고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함께 계신 우리의 천상부모님, 즉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바르티매오가 한 일은 별것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계심을 믿고 계속 소리를 질러댄 것입니다. 그는 계속,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조용하라고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이 기도를 반복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눈을 뜨게 됩니다.

겉옷은 바로 자신이 가진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겉옷은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에겐 유일한 이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절실해지지 않는다면 눈을 뜰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오늘 눈을 뜬 소경 만큼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기를 절실하게 청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절실하다면 고해성사를 같은 죄로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절실하게 청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하게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하지도 않는 것을 알아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졌듯이 지금까지 살아오던 우리의 생활방식, 즉 쉽게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죄를 짓던 생활방식을 벗어던지고 이제는 빛의 아들로서 살겠다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절실함입니다. 절실하게 죄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없으니 고해를 해도 그 죄를 또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삶이 우리의 행복을 빼앗는 것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우리를 빛으로의 삶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간곡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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