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눈먼 거지'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5 조회수1,057 추천수4 반대(0) 신고
<눈먼 거지> (마르 10,46-52)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바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은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리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나는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가?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가? 무감각하다면 큰 일이다. 그것은 나자렛 예수라는 분이 나에게 있어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라는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야말로 무신앙인이요 아니면 중풍병자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오게 하신 후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그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를 뻔히 아시면서도 물으신다. 왜 물으시는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 아무것이나 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항상 우리의 원의를 존중하신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데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는데 일방적으로 무엇을 무조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어떤 원의가 있는가? 가 중요하다. 그것도 청해도 되고 청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이 소경처럼 간절한 원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주고 싶어하셨던 것, 언젠가 당신에게 청하면 꼭 주어야지 하고 예수님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청해야 한다. 예수님은 늘 준비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지 못한 이유는 내가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나에게 유익하지 않은 즉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예수님께 청할 때에는 반드시 강렬한 원의가 있어야 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그 무엇이 있는가?" 나에게 유익하고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합당한 그 무엇이 있는가?  많은 것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심리학에서 테스트 한 것인데 사람들에게 백지를 나누어 주고 "지금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적어라."고 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적지 못했다고 한다. 참 웃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럼 나는 지금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적어보자.    이것은 지금 우리가 무엇이 중요하고 꼭 해야하는 일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그냥 주어진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은 매사에 있어서 적당히 생활하는 사람이며 창의적이지도 못하고 능동적이지도 못하고 수동적이고 습관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매 순간을 생각하며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리고 늘 깨어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누가 물어 보아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소경은 즉시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늘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 가만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가든 무엇을 듣든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가였기 때문에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큰 소리로 더욱 큰 소리로 외쳐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절한 소원이 나에게도 있는가? 온 몸을 던져서 청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정말 내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청하고 바래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솔로몬이 하느님께 대답하였다. "이제 이 백성을 이끌 수 있도록 슬기와 지식을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대답하셨다. " 부귀 영화를 청하지도 않고 원수의 목을 청하지도 않았으며,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내가 맡겨 준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슬기와 지식을 달라고 청하다니, 네 뜻이 갸륵하구나. 슬기와 지식뿐이랴? 내가 너에게 부귀와 영화도 주리니, 너와 같은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다시 없으리라."(역대 하 1, 11-12)라고 하셨다. 또 시편작가는 "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 성전을 우러러 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오니"(시편 26, 4)라고 하였다. 나는 주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 청할만한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하겠다. 그것은 나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겠다. 그것은 늘 내가 갈구하던 것이어야 하겠다. 단순히 좀 더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고 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더 고상한 것,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겠다. 잠시 지나가는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원을 지향하는 영적인 것이어야 하겠다. 하느님께 청하기에 걸맞는 것이어야 하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 소경처럼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으면서도 아직까지 내가 믿는 "나자렛 예수"라는 분이 어떤 분이신 지를 잘 모른다면 장님이 아니었는가?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나자렛 예수"가 나를 위해서 어떤 위대한 일을 하셨는 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이 아닌 엉뚱한 길에서 지금까지 헤매고 있었다. 이제는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올바로 알고 올바로 따라 가야 한다. 이 소경이 눈을 뜨자 예수를 따라 갔듯이 우리가 눈을 떠야 예수를 올바로 따라 갈 수 있다. 예수님이 걸어가실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분이 보이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우리도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