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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8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30 조회수429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 30주간 금요일]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6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요즘처럼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경우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제 방송법 등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에서 헌재 판결은 법을 어겼지만 잘못은 없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을 하였습니다. 헌재의 판결로 정치권의 분란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란만을 더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국민들에게도 가치관에 심한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동일 회기 중에는 부결된 안건은 재심의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고, 투표과정에서도 불법성이 인정되지만 법률의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법률안이 법률이 되기 위해서는 국회법에 따른 적법절차를 지켜야하고 적법절차에 하자가 있다면 당연히 무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법절차는 무시해도 된다면 국회법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판결은 수단과 방법은 불문하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해괴한 논리이고, 이런 논리가 통용되는 곳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승리밖에 없는 전쟁터에서나 가능한 논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쟁터와 다름없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전쟁터와 같은 무한 경쟁에 내 몰리고 있으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목적달성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번 판결은 이런 잘못된 가치관에 제동을 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하고 있으며 이런 판결을 내린 자들은 고위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에서도 봐 왔듯이 자신들의 삶이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오늘 그 자리에까지 왔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시키는 판결을 내린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을 무력화시키는 그들과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의 오늘 행위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율법도 광야에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여야 했던 민족들에게 공동선을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줘야 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는 율법을 어긴 자에게는 그에 상응한 제재를 가해야 하므로 이를 감시하고 제재를 가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제재를 통하여 민중들 위에 군림하므로 율법은 권력을 잉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공동선의 순수한 뜻에서 만들어진 율법을 준수하면 율법의 감시자들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율법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민중들을 계속하여 지배할 수 있게 되므로 선의의 율법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었던 것은 비단 유대사회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인류 공통의 역사이고, 우리는 그중의 하나인 유대사회를 통하여 이런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율법이 권력의 유지수단으로 변질되어 민중들은 율법의 피해자가 되었기에 이에 항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모두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살기 위해서도 나와 알게 모르게 관련된 모든 관계가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어야하며 이런 상태가 공동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모든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고 이런 사회를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여라! 이 한마디뿐 입니다. 안식일 제도도 노예와 종들에게 1주일에 하루는 고된 일에서 해방되어 휴식을 주기 위함이므로 사랑의 실천을 강제하기위해서 생겨난 제도입니다. 유대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은 안식일 제도의 바른 뜻을 알려주기보다는 안식일을 어기면 안 된다는 사실만 민중들에게 각인시켰으므로 사랑의 실천을 담보하기 위한 안식일 제도의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의무가 되어 오히려 안식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비단 안식일 제도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의 거의 모든 율법이 이렇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이런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며 이는 안식일 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본래의 뜻에 충실하려는 것이므로 오히려 완성이라 할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 17)하였습니다. 완성은 본래의 취지에 충실할 수 있도록 잘못된 요소는 개선하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제도를 어긴 것이 아니라 개선을 통해서 완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요즘 사법부는 잘못된 것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잘못된 것을 더 합법화시켜 주는 논리를 개발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율법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운영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능의 열쇠인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셨으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 사도에게만 천국의 열쇠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의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베드로 사도에게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고 하고 있으므로 바로 이런 자들이 예수님이 그토록 저주를 하였던 율법학자들이고 바리사이들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하였다'(로마 5,17)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들이 율법을 만들었다면 그 율법은 민중들에게 오히려 해악을 가져 올 것이며, 사랑이 없는 자들이 율법을 집행하면 율법은 통치의 수단이 될 것이며, 사랑이 없는 자들이 판관이 되면 통치자에게 아부를 하여 민중들은 더 더욱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 많은 율법들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랑 하나면 모든 율법은 완성된 것임에도 우리 교회부터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역으로 그 많은 율법들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그나마 위로를 받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찾아 왔으나 숱한 율법으로 이중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를 선도하기 위해서도 우리 교회의 율법부터 조직논리가 아닌 사랑 하나로 완성되기를 소망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예수님은 율법을 잘못 운영하면
오히려 민중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므로
모든 율법은 오직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율법을 만드는 사람이나, 감시하는 사람이나. 이를 판결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억하도록 이 땅에 곳곳에 사랑의 성령을 가득 부어주시고
우리 교회에도 율법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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