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 10.2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30 조회수390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로마8,31ㄴ-39 루카13,31-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씨의 인터뷰 내용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태백산맥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필사시킨 이유에 대한 해명입니다.
“제가 굳이 ‘태백산맥’을 베끼게 한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는지 직접 체험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태백산맥 열권을 베끼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1년 365일에서 일요일을 뺍니다.
  3백일에, 4년이면 1천2백일입니다.
  하루에 원고지 10매씩만 베끼면 4년이면 다 베낀다는 것입니다.
  10매를 베끼는 데는 1시간쯤 걸립니다.
  하루에 1시간의 노동을 바치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무려 4년에 걸친 방대한 소설을 필사한
작가의 자랑스러운 아들과 며느리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 신구약 성경을 매일 이렇게 필사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언젠가는 실행하려 합니다.
 
성경이 아니더라도
그날의 매일미사 말씀만 필사하고 미사에 참석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읽는 것보다 훨씬 깊이 있게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를 체험할 것입니다.

독특한 부부가수인
정태춘씨에 대한 그의 아내
박은옥씨의 인터뷰 한 대목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이이는 1집 때 보다 지금 목소리가 훨씬 더 깊어졌습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깊어졌다.’ 라는 말마디입니다.
 
‘아 호수만 깊은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눈빛도 연륜 따라 깊어질 수 있구나’ 하는 자각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 깊어지는 목소리요 눈빛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자식 잃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새로운 슬픔으로 다가 온다 합니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합니다.
 
요즘 자식 잃은 몇 분의 어머니들을 만나며 절실히 깨닫습니다.
 
특히 10대나 20대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자살로 잃은 어머니들,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지요.
 
누가 그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어느 어머니의의 고백입니다.

“가까운 어느 친지의 죽음도 자식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랑했던 언니도, 어머니도, 남편도 다 견딜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의 죽음은 참 견뎌내기 힘듭니다.”

이래서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즉시 물었습니다.
“이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비한다면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도될까요?”

“100분의1, 아니 1000분의1도 안될 것입니다.”
자매님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자식을 키워가면서, 자식의 죽음을 겪으면서
비로소 부모님의,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즉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하느님의 무궁한 사랑에 가장 근접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여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힘이 그토록 위대하며
어머니가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언젠가 떠난 자식도 그 어머니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어머니에게 소중한 자식이듯
하느님에게는 누구나 소중한 사랑의 대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식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의 자식 사랑보다
하느님의 우리 사랑은 얼마나 깊고 무궁하겠는지요.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들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독서의 사도 바오로,
누구보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절절히 체험한 분들입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가야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백절불굴의 삶을 살면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음도
바로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서 가능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서 샘솟는 용기요 사랑이요 희망이요 믿음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절절히 체험한
다음 사도 바오로의 고백은 늘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오로처럼
하느님 사랑의 체험으로 무장한 자들, 천하무적의 사람들입니다.
 
자식을 키워가면서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 가듯
우리 역시 이런저런 삶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갑니다.
 
결국 영정성장, 내적성장도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체험과 함께 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것,
이게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시간,
주님은 당신 사랑의 결정체인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