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1.23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다니1,1-6.8-20 루카21,1-4
"제 얼굴"
제 얼굴을 지니고 살 때 행복입니다.
“주여, 당신의 종위에 당신 얼굴을 빛내어 주소서.”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 얼굴을 찾는 마음은
바로 하느님 얼굴을 닮고 싶은 마음의 반영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하느님 얼굴을 닮아갈수록 제 얼굴이 됩니다.
과연 세월이 흘러도 제 얼굴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얼굴은 하나도 없고 다 각기 고유의 얼굴입니다.
누구나 소중히 여기는 얼굴이요
얼굴에 대한 평가에는 지극히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부끄러운 일이나 떳떳하지 못하면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숙이는 사람들입니다.
웃음으로 활짝 열린 얼굴과
분노로 굳어져 벽이 된 얼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얼굴은 마음이자 영혼이요 삶이자 운명이요 삶의 이력서입니다.
얼굴에 관한 속담도 참 많습니다.
‘얼굴에 노랑꽃이 피다’
‘얼굴에 똥칠을 하다’
‘얼굴에 철판을 깔다’
‘얼굴에 침 뱉다’
‘얼굴을 깎다’
‘얼굴을 팔다’
‘얼굴이 간지럽다’
'얼굴이 뜨겁다‘
…끝이 없습니다.
얼마나 삶이나 마음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얼굴인지 깨닫습니다.
얼굴은 바로 그 사람이자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좋아진 얼굴도 있지만 많이
상하고 망가진 얼굴들 때문입니다.
‘아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상할 수 있나.
오래되어 굽은 나무처럼
한 번 형성된 얼굴은 제 얼굴로 되돌리기가 참 어렵겠다.
어렵고 힘든 세상,
제 얼굴을 지니고 사는 것이 참 힘들겠구나.
수도승들이 삭발하는 까닭도
끊임없이 제 얼굴을 확인하면서
제 얼굴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하느님을 자주 뵈오며 살 때 제 얼굴을 회복합니다.
똑같은 얼굴이 아니라 개성 있는 얼굴이듯,
하느님의 얼굴을 자주 뵈올 때 고유의 아름다운 제 얼굴입니다.
제 얼굴을 회복하는 길은
하느님 얼굴을 자주 뵈오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 하나뿐입니다.
내 운명을, 삶을, 마음을,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이래서 수도승들은 제 얼굴을 찾고자
끊임없이 하느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감
사와 찬미의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바로 오늘 독서의
네 유다인 젊은 이들과
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제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들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다니엘을 위시한 유다의 세 젊은이들
끝까지 하느님께 충성을 다했고
하느님은 그들을 지켜주셨기에 제 얼굴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내시장에게 간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네 젊은 이들은 줄곧 채소만 먹었어도
궁중 음식과 술을 먹은 다른 어떤 젊은이들 보다 아름다운 용모였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성을 다했던 이들의 제 얼굴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이 네 젊은이에게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으며,
특히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잘 먹어서 제 얼굴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제 얼굴입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궁중 음식과 술을 즐겼다면
이들은 제 얼굴을 많이 잃어 버렸을 것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 일, 도박 등
각가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제 얼굴을 잃어가고 있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제 얼굴을 지니고 곱게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의 역경 중에도
제 얼굴을 지킨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가난도
믿음이 좋은 가난한 과부의 영혼을, 마음을, 제 얼굴을
다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가진 생활비를 모두 하느님께 봉헌한,
재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운,
제 얼굴을 지닌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세상의 종이, 재물이 종이 아닌 하느님의 종이 되어 살 때
제 얼굴임을 깨닫습니다.
끝없는 시련과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살 때 제 얼굴이요
자주 이런 제 얼굴의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참 엄중합니다.
제 운명을, 삶을, 마음을 바꾸는 길은,
제 얼굴을 지니고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더디더라도 이 길 하나뿐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성
경묵상을 통해,
선행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 제 얼굴의 회복이요 형성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얼굴을 뵈오며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을 닮아
제 얼굴을 찾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시편2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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