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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27 조회수615 추천수4 반대(0) 신고

대림 제1주일       2009년 11월 29일


루가 21, 25-28. 34-36.


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대림(待臨)시기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교회 전례의 새 주기(週期)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고, 대자연도 푸른 생명의 빛을 잃어 가면서 죽음의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새 주년(週年)을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삶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발생시킨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등 천체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기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구약성서의 유대교 묵시문학의 표현들(하깨 2,6; 요엘 4,16; 집회 16,18; 다니 7,13-14 참조)을 빌려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가 말한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창조와 세상 종말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인류의 기원(起源)이나 역사의 종말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또 세상 종말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그것을 기록한 공동체가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세상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 종말과 삶에 대한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적 가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한 다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그분이 하신 자비와 사랑의 실천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어서 복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방탕하거나 만취하는 일이 없고, 일상의 근심에 얽매여 허송세월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삶 안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면, 우리가 얻은 이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높으신 분, 우리가 그분의 법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우리의 편견입니다. 과거 세상에는 높은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법을 지키고, 그들에게 바쳐서,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에게 연장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세상의 관행에서 발생한 편견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참으로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그 최후를 마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과 성전의례를 강요하면서 가르친 하느님을 거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율법과 성전의례에 예속되어 비굴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것을 영접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소외시킨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자와 장애인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어, 하느님이 벌하시기 위해 그런 불행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연민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거나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자기들과 달리 믿고 있는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연민은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연민은 강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또 연민이 우리 안에서 발동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치며 실천하신 그 연민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해가 또 가고 있습니다. 열 두 장이었던 달력의 남은 한 장이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웃을 향한 연민의 순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셨던 순간들이 많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으면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서’ 살다가 낙엽으로 지는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시도록,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절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갑니다. 하느님의 연민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나도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시기를 시작합시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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