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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를 향하는 인간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29 조회수1,007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대림 제 1 주일 - 그리스도를 향하는 인간

 

 

 

오늘은 기분 좋은 새 해의 첫 주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또 종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김빠지네, 오늘 복음은 누가 정한거야?’

이렇게 좀 불평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저의 어렸을 때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의 어렸을 적 첫 기억도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뛰어다니며 놀던 기억과 그분들의 장례 때의 기억이 저의 첫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 전례에서 새해 대림 첫 주부터 마지막을 생각하도록 복음을 정한 것은 깊은 뜻이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어디를 보고 던집니까? 바로 공이 날아가서 도착 할 포수의 글러브를 보고 던집니다. 타자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타자를 보고 던지다가는 공이 타자에게로 날아갈 것입니다. 또 달리기를 하는 선수가 관중들을 보며 뛰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보고 그 곳에 도착할 때까지 목적지에서 눈을 Ep지 않습니다. 인간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뛰게 되어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를 보지 않고 주위에 있는 것들이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삶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태어나자마자 죽음이라는 저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제가 된 것도 이 기억이 큰 작용을 하였습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보다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더 행복하기 위해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차차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물론 혼인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혼인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로 볼 때 성소의 길은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베드로가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물고기만 잡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를 잡는 것과 사람 영혼을 잡는 것과는 물고기와 사람 영혼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삶의 가치도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물고기를 잡으며 살기보다는 잠깐의 즐거움을 보지 않고 영원한 가치와 행복을 보게 해 주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기억이 항상 저의 기억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죽음의 기억이 저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친구처럼 함께 해 주었고 목적지를 똑바로 보게 해 준 하느님의 큰 은총이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지금 처음부터 죽음을 생각하게 해 주셨던 것을 가장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죽음과 가까운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떨어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암벽을 오르기도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얼음으로 덮인 높은 산에 오르며 자칫 실수를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자동차 경주를 합니다. 사고로 실제 죽기도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런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얼라이브’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여객기가 눈으로 덮인 산맥 위에 떨어져서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인육으로 목숨을 연명합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게 되었는데 아마 그 이후 그들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삶을 오히려 생기 있고 풍요롭고 알차게 하였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잠자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깨어나게 합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실 때부터 죽음을 항상 달고 다니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 예언자 시메온은 예수님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어머니도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조금 뒤에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를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다행히 이집트로 피신하여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도록 오래전부터 예언되어 있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죽음의 공포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삶이 길지는 않았지만 가장 생기 있는 삶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각하지 않으려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더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생기를 잃게 만드는 독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해 첫 날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 데 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 날이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 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종말이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 동안 기다려왔던 또 다른 시작이란 바로 메시아의 탄생입니다. 억압된 세상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 된 불멸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오셨는데도 유다인들은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2000년 전에 이미 왔었고 이스라엘에서 다만 몇 명만이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왜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했을까요? 바로 그들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 ‘도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시에 태어나지 않으시고 조용한 시골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도시의 삶은 종말을 사는 삶이 아니라 목표를 잊고 세상에 집착하는 삶입니다. 도시의 삶이란 아이가 학교에 가다가 학교 가는 것은 잊고 오락실이나 만화방, 인터넷 방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노는 것과 같습니다. 피시방에 가는 아이들 탓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은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지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도시에 있는 수많은 걱정거리와 유흥거리들은 우리의 목적지를 잃게 만들고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어 영혼을 잠들게 하고 하느님을 잊게 만듭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먹고 마시고 돈 벌고 시집 장가가고 정신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아만이 늘 깨어있으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언제 종말이 오더라도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놀라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뜻은 항상 종말에 살기 때문에 항상 주님 앞에 있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시간이 종말이고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종말에서 멀어져 있으면 하느님과도 멀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만이 종말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상에 집착하며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는 한 순간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즐기는 삶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소돔이라는 도시에 들어갔을 때 롯만이 그들을 맞이하였고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만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그 손님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롯만이 살아남고 악인들은 유황불로 완전 멸망하였습니다.

간단한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일은 또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들판에서 양들을 치던 목동들만이 예수님을 경배하였고 나머지는 도시에서 흥청망청 바쁘게 살다가 그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구원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종말은 노아의 홍수 때보다도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비참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심해의 어두움(노아의 홍수)과 영원한 불의 뜨거움(소돔과 고모라) 속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순간이 바로 도시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비참한 종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종말의 삶을 살지 않고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생각해 봅시다. 남편이 직장에서 올 시간이 되면 아내는 문 밖으로 나와 남편을 기다립니다. 집 안이 더 따듯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재미난 것도 많이 하지만 남편을 단 일초라도 더 빨리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문 밖으로 나오고 남편이 오는 길로 한 걸음씩 자신도 모르게 걸어갑니다. 종말을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즐거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목적지만 보이지 주위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너무 집착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원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도 아닌 것입니다.

 

2012년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주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만약 세상 것에 아주 잠깐이라도 눈을 돌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남도 하나의 종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적지이고 방주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있으니 그분만을 보고 달려가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이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더 사랑하기 위한 노력’임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 눈에 그리스도만 들어오고 그분만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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