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존재 이유 (미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03 조회수1,671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축일 - 존재 이유 (미션)

 

 

 

하느님이 처음에 진흙을 빚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만 자신과 같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남자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직 여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서 하와를 창조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아담은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인간임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상대인 ‘너’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 없이 아내가 될 수 없고 부모가 자녀 없이 부모가 될 수 없고, 또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없이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담도 하와가 없이는 온전한 의미의 아담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서로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서로가 상대를 보아줌으로써 상대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아담을 위해 하와를 창조하셨지만 사실 아담도 하와를 위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만드실 때 아무 이유나 목적 없이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마치 제가 로마에 보내진 이유가 공부하기 위한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이 목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끝까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포기하십니다. 즉, 지옥에 가도록 놓아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존재 이유를 ‘Mission’이라 합니다. 우리말로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mission을 ‘선교’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너무 협소한 의미입니다. ‘Mission’은 ‘존재의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는 두 사람이 사랑하여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는 의도였습니다. 따라서 자녀를 낳으려는 의도가 없는 성적인 행위는 모두 하느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Mission’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미션을 수행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해주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도 구원될 수 없고 예수님조차도 이 세상에 태어나실 이유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아 당신의 ‘미션’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자’란 칭호를 부여받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이런 미션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란 말은 ‘apostolus’, 즉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도들만이 파견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의 눈을 만들어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실로암’ 역시 ‘파견된 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랑한다면 자신만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눌 줄 알아야합니다. 이 나눔이 바로 구체적으로 ‘선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봉쇄 수도원 안에서 선교의 지향으로 작은 희생들을 바칠 수 있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처럼 직접 발로 뛰면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 형태야 어쨌든 이 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주님을 전해주고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구원받지도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