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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73) 위대한 침묵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0 조회수681 추천수4 반대(0) 신고
 
 
   (473) 위대한 침묵
                               이순의
 
 
산에서 내려와 침묵답지도 않은 침묵 속에서 머물고 있다.
먹고 자는 시간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낮에도 잠을 자는가 하면 밤에도 깨어있다. 14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멀리 비행기 활주로 같은 뚝방길 가로등을 따라 시선을 굴릴라치면 백열등 불빛이 야외 공연장 같은 밝음으로 빛나는 곳에 눈동자가 멈추어 선다. 저곳에 내 짝꿍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곱씹다가 제 풀에 꺾여 몽유병 환자처럼 풀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뚝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는 다시 그 활주로 같은 뚝방길의 가로등 불빛을 따라 시선을 굴려보고 그 야외공연장 같은 백열등 불빛에 시선을 멈추고 벌떡 일어선다. 그렇게 새벽이 오시고 지친 꿈속에서 아침을 맞는다.
 
그러다보니 의지력을 동원해 미사시간을 맞출 수도 없고, 일부러 밖에 나갈 거리도 찾지 못하고, 먹고 잠자는 순간들이 엉망이 되어있다. 왜 이럴까? 성당에 가야 되는데 왜 이럴까? 날이 밝았으니 일어나야 되는데 왜 이럴까? 밥 먹어야 되는데 왜 이럴까? 생각만 할 뿐,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력이 없다. 내 자신도 짝꿍도 여름 내내 너무 고생하고 돌아온 후유증이라고........ 그냥 쉴 때 푹 쉬어야 한다고........ 합리적인 사고 안에서 서로를 모르는 척 해 주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다.
 
그런데 반장님께서 방치된 시간들 속에 돌멩이를 던지고 계신다. 물무늬가 파장이 되어 퍼지고....... 그 순간만이라도 놓은 정신 줄을 부여잡고 일어난다. 성지순례를 가시자 하여서 내가 가 보았던 그곳에 가 본다. 그전의 그 열정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전의 그 신앙이 다 어디로 갔을까? 습관 된 모습은 변함이 없으나 깊은 곳 마음은 몽롱하다. 내 인생이 지금 어디만큼 와서 무엇을 향하고 무엇을 추억하는가? 반장님께서는 십자가 길의 14처 기도문을 낭송하시느라고 한결같은 음성을 깔아주시는데 나는 내 삶의 앞과 뒤를 안개 속에서 휘젓고 있다. 주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신 길이 나의 출생이라고 본다면 나는 지금 어디만큼 당도한 것일까? 앞으로 남은 길은 반이나 남았을까? 아니면 아직 걸음마도 못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불현듯이 옷 벗김을 당하신 주님 앞에서 마음이 멈춘다. 그리고 나 지금 옷 벗김을 당하고 있다고 동질의 위로가 뼈 속으로 파고든다. 아! 나는 지금 옷 벗김을 당하신 주님의 길까지 왔구나. 앞으로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못도 박혀야 하고, 채찍질도 맞아야 하고, 그러다가 주님께서 가신 그 열네 번째 길에서 나도 주님을 따라 죽겠구나. 나에게 인생이 연속적이지 않다는 것이 위로였다. 주님께서 열네 번째의 길 끝에서 죽으신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죽음이 보장되어 있다는 약속이 축복으로 심장을 데우고 있었다. 목소리라는 봉헌의 돗자리를 깔아주시는 반장님 몰래 나는 육신을 취하여 죽지 않을까 걱정없는, 영원히 살아있지 않고 주님의 약속처럼 반드시 열네 번째의 십자가 길 끝에서 죽을 수 있다는 은총에 감격하고 있었다.
 
어쩐지 허구 같은 내 모습에 동행한 반장님께 양심적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내면의 세계를 뭐라고 표현해 드릴 수가 없어서 죄송하고, 반장님께서는 내게 봉사를 해 주시는데 나는 내 자아의 벽 안에 가두어져 드릴 것이 없으니 죄송하였다. 그렇다면 신세가 깊어지느니 이제 그만 따라나서야 될 것 같다고 마음을 고처 먹었다. 사실 열정이 약화되었고, 의지가 둔탁해지다보니 지치기도 하였다. 작은 외출에 지처서 먹는 것도 삼가 한 채 잠만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사정과는 별개로 반장님께서는 또 영화를 보러가시잔다. TV 광고에서 슬쩍 본 것도 같은, 영화를 보러 가시잔다. 열정도 소진되고, 의지력도 둔탁한 상태로 대답만 하고 약속을 했다. 성지순례 날에 14처 기도문을 봉헌 받은 것처럼 또 반장님으로부터 봉사를 받게 될지에 대하여 생각도 없었다. 정신 줄 놓고 내 자아의 벽에 가두어진 신세가 깊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냥 또 약속을 하고 말았다.
 
여인의 삶! 남편을 얻고 자식을 키우며 가정을 지킨다는 여인의 삶에 대하여 주고 얻는 대화도 있었다. 착각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세우며 살아 온 지지대 같은 개똥철학도 있었다. 혼자보다 둘이 된다는 것은 내면의 잡음들이 동행되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여인의 삶은 여인이기를 포기하고 살을 때 성스러운 가치들을 보존 유지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지키고자한 가치들도 얻고 여인의 자리까지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더 성스러운 가치에 온전히 내어놓고 살아지는 이야기들이다. 둘이 걷는 벗이 같은 신앙을 가졌다는데서 교감할 수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벗을 삼아서 본 영화가 <위대한 침묵>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위대한 침묵이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안내방송이 있었다. 2시간 42분의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다 보지 않아도 30분만 보아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는 안내였다. 장편영화를 시작하면서 왜 저런 안내방송을 해 줄까? 라는 의문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부터 침묵이었으니까! 영화를 보다가 졸려서 잠이 들더라도 그 안내방송 때문에 전혀 미안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내 잠이 들 수 있었고, 잠이 깰 수도 있었고, 그렇게 반복하여도 전혀 아쉽다거나 아깝지도 않은 침묵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형 드라마는 해설이 붙는다.  대사가 없다면 배경음악을 깔아서 그 분위기의 전개를 확장시켜준다. 그래서 음악만으로도 관객들은 공포에 질려 그 화면이 펼쳐지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카메라의 초점을 따라서 들려주는 효과음만으로도 그 희비가 예견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대사도 없고, 음악이라든지 효과음도 없고, 해설은 더욱 없다. 자막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성경말씀이거나 회칙 정도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침묵의 위대함뿐이다. 
 
제목;  위대한 침묵
감독;  필립 그로닝
배경;  카르투지오 수도회
촬영기간; 6개월
상영관; 씨네 코드 선재
기타; 1984년 <침묵을 어떻게 영상 속에 담을 것인가?> 라는 화두로 작품을 구상했던
          필립 그로닝 감독은 해발 1300M 알프스 깊은 계곡 카르투지오 수도회가 적격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도회를 공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니 준비가
          되면 부르겠다는 약속을 기다린 지 19년 만에 영화를 촬영하게 된다.
참고;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1084년에 프랑스의 샤르트뤼즈지역에 성 브루노  
          (1030~1101)에 의해 설립된 가톨릭교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수도회,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며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방문객
          을 받지 않으며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해전세계에 19개의 수도원이
          있으며, 수사는 총 370명이다.
 
 
사담; 이 영화는 보고 감동을 받으려 하면 모순이다. 그냥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촬영기간이 1년도 안 된다. 그래서 겨울에 시작하여 여름까지 찍고 가을 없이
          찍어 놓은 겨울로 영화를 마감 지었다. 더구나 이 영화는 감독이 수사님들과
          함께 6개월 동안 독방에 살았고, 생활과 일정에 참여했으며, 은둔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의 침묵이 아닌 일상의 이야기를 읽으려한다면 이해불
         가 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침묵속의 고요를 얻고, 침묵 속의 소리를 얻어야
         한다. 그 안에 침묵이 있고, 그 침묵이 곧 이 영화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9년이
         라는 준비로 영화촬영을 허가했다지만 그 19년의 준비는 침묵만 허락 되었을 뿐
         수도회의 어느 것도 공개된 것이 없는 영화였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 얻는 감동은
         각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던진 화두는 각자
         알아서 취할 침묵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얻은 감동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다.  
 
대림시기의 큰 성찰은 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복잡한가?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시끄러운가?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그렇게도 얽혀있는가? 
주님을 따라 사노라고 살다가 보면 열네 번째 길 끝에서는 주님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약속이 있는데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복잡하고,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시끄럽고,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그렇게도 얽혀있다는 말인가? 나는 왜 내 영혼에게 침묵을 선물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침묵 속에서 고요를 얻지 못하며, 왜 침묵 속에서 소리를 얻지 못하는가? 영화를 통하여 침묵의 위대함은 보았으나 내 안의 침묵은 소란만이 소용돌이를 타고 있다.
가정이라는 성전을 지키는 사람으로서도 소란하고
짝꿍을 지키는 아내로서도 얽혀있고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도 시끄럽고
나도 그 수도회에 입회하여 그 위대한 침묵의 진실성을 터득하고 싶다.  그러나 그 길은 나에게 허락하신 길이 아니질 않은가?! 가정이 우선이고, 짝꿍이 우선이고, 아들이 우선이고, 그 위대한 침묵보다 우선인 번민들! 그래도 잠시! 반장님께서 시켜주신 호사스런 일탈을 통하여 얻는 고요도 있었다. 열네 번째 길 끝! 위대한 침묵에게도 위대한 번민에게도 열네 번 째 길 끝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  산에서 내려와 침묵답지도 않은 번민 속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 약속만큼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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