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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1 조회수607 추천수3 반대(0) 신고

대림 제3주일 2009년 12월 13일


루가 3, 10-18.  필립 4, 4-7.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면서 가르친 회개를 소개합니다. 회개는 삶을 바꾸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은 군중에게는 옷과 먹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라고 권하고, 세리에게는 정한 것만 징수하라고 하며, 군인에게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지 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라고 타이릅니다. 그 가르침은 그 시대 유대교의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을 잘 지키라고 말하지도 않고, 성전에 십일조와 제물을 봉헌하는 데에 충실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자각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분”(출애 33,19)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이웃에게 실천하게 합니다. 제물봉헌은 인간이 생산한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바치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소출을 새롭게 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게 하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한 삶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군중과 세리와 군인이 삶을 바꾸는 구체적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의식주(衣食住)만을 생각하지 않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한 일을 이웃을 위해 실천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요한의 설교에는 다소 위협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와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복음 사이에 어떤 동질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하느님은 엄한 심판자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도, 성전에 제물봉헌을 하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계시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실세인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는 충실하지만,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가련히 여기지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가르침을 연장하여 발전시킨 것은 하느님 앞에 자기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운동가들과 달리, 요한은 세례를 줄 때, 삶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더 발전시키셨습니다. 다만 요한이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전제하고 말하는 반면,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삶을 가르칩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꽃을 보면서(마태 6,26-28)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깨달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다 잘 비유하셨습니다(루가 14,15-24). 하느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잔치를 은혜롭게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공로대로 나누어지는 대가도, 급식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초대받아 태어났으며, 베풀어진 잔치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우는 이도, 고통당하는 이도, 굶주리고 헐벗은 이도 많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입장한 우리가 나누면서 돌보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삽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 되는 권능을” 받았다고 요한복음서(1,12)는 말합니다.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는 선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면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을 모범적으로 하여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의롭지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인간이 의롭지 않아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만 보고, 초대 받은 잔치를 원망과 비난을 배설하는 기회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을 넘어 하느님이 살려놓으신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행을 넘어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기다린다는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삶을 바꾸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바꾸되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그분의 생명을 사는 실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주변을 보고, 베풀어진 우리의 삶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초대하신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그분의 베풂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며 행세하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 안에 태어난 우리도 휩쓸려 즐겨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삶에서 베풀고 용서하는 자비의 삶에로 옮겨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설교한 엄한 심판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베푸십니다. 우리도 그것에 참여하여 축복하고 베푸는 기쁨을 나누라는 초대입니다.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서도 은혜롭게 베풀어진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받은 삶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쁘고 즐겁기만 한 세상이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기쁨과 너그러움으로 채색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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