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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엇을 해야 합니까?" - 12.1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3 조회수475 추천수6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2.13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스바3,14-18ㄱ 필리4,4-7 루카3,10-18

                                                    
 
 
 
 
"무엇을 해야 합니까?"
 
 
 


대림 제3주간이 시작되는 어제 저녁 기도 시
성전에 들어가 제대에 큰 절을 올리며
영롱하게 타오르는 세 개의 대림 촛불을 보는 순간 기쁨이 샘솟는 듯 했습니다.
 
세 영롱한 촛불의 조화가 참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였습니다.
 
마치 세 개의 촛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음, 희망, 사랑의 향주삼덕(向主三德)을,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 하느님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
일명 ‘기뻐하라(Gaudete)' 주일로, 또 장미주일로 부르기도 합니다.
 
기쁨 가득할 때 얼굴도 홍조를 띠듯
제의도 대림의 충만한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아름다운 색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What should we do?)

우리말 번역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다는
더 직접적이고 힘이 있기에 영어의 뜻대로 직역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로 바꿨습니다.
 
대림3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질문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며
고맙게도 주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답을 주십니다.


첫째, 기뻐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온통 기쁨입니다.
외적환경에서 오는 덧없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말 그대로 기쁨의 샘입니다.
 
오늘 2독서 필리피서 기뻐하라는 말씀,
바오로 사도가 옥중에서 신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사방이 꽉 닫힌 옥중에서 샘솟는 기쁨을 누린 바오로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해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핵심은 ‘주님 안에서’입니다.
 
세상 기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쁨이요 주님이
가까이 오셨으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 역시
바빌론 귀환 시의 황량한 사막 같은 분위기에서 기뻐하라 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다음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한 스바니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런 기쁨 있어 말 그대로 영적고공비행의 여정입니다.
 
이런 기쁨을 좌절 시킬 자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참 맛은 이런 기쁨의 맛, 하느님 맛입니다.
 
이런 기쁨 있어야 몸과 마음이 다치지도,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바로 우리 한 가운데 계신 기쁨의 샘 하느님으로부터,
이 거룩한 미사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기쁨입니다.
 
바로 이런 기쁨은 그대로 빛이자 생명이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님께로부터 샘솟는 기쁨 있을 때
저절로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활력 넘치는 삶이 펼쳐집니다.
 
걱정은 저절로 사라져 너그러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줍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기뻐할 때 영육의 전인적 치유요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우리들입니다.
 
기쁨보다 더 좋은 영약은 없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없습니다만 영어 스바니야서는
기쁨으로 노래하라(sing)고 두 번이나 나옵니다.
 
기쁘면 저절로 나오는 노래요 춤입니다.
 
1독서 스바니야서 마지막 구절은 공동번역이 더 실감납니다.

“너를 구해내신 용사 네 하느님 주님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추시는 하느님,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추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내 영혼이 기쁨으로 뛰논다며
마니피캇을 바친 성모님이 생각납니다.
 
그러니 기쁨으로 찬미와 감사의 노래기도 바치는
미사와 시편기도 시간은 얼마나 복된 시간인지요.
 
문득 ‘환희(歡喜)’란 말이 떠올라 사전을 찾았습니다.

“즐겁고 기쁨.
  불교에서 불법을 듣고 신심으로써 얻는 마음의 기쁨”

불교 선사들이 진리를 깨달아
기쁨에 충만하여
오도송을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경우의 환희심은
그대로 우리의 기쁨과 일맥상통합니다만
우리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역동적 기쁨에는 못 미칩니다.

둘째, 나누십시오.
기쁨으로 가득 할 때 저절로 나눔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나눔의 하느님이십니다.
 
끊임없이 나눠주심으로 늘 충만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늘을 나누시고,
땅을 나누시고,
공기를 나누시고,
물을 나누시고,
생명을 나누시고,
빛을 나누시고,
시간을 나누시고
온통 자신을 활짝 개방하여 우리와 나누시기에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개방과 나눔, 바로 하느님의 개방과 나눔에의 참여입니다.
 
어제 잠시 열쇠를 잃어버려 많은 분심을 했습니다.
 
‘아, 열쇠가 없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좋을까’ 생각하던 중
하느님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문이다’ 말씀하신 예수님도 생각났습니다.
 
열쇠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이
바로 하느님이자 예수님이십니다.
 
늘 자신을 활짝 열어 모두를 나누시고,
이 생명의 미사잔치에 초대해주셔서
당신의 말씀과 성체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묻는 이들에게 주님은 나누라 하십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나눔을 통해 회개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회개의 구체적 열매가 나눔입니다.
 
없어서 못 나눈다는 것은 변명이요 거짓말입니다.
 
돈이 없으면,
시간이, 힘이, 마음이, 사랑이,
희망이, 믿음이, 평화가,
위로가, 기쁨이, 말이, 미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긍정적이고 밝은 면만 나눌 것이 아니라
슬픔도, 상처도, 아픔도, 절망도 나누면 치유되어 자유로워집니다.
 
나눔 중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천량 빚을 갚는 다는 말도 있듯이
때로 친절한 말 한마디, 부드러운 미소가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요.
 
사실 좋은 사람의 존재 자체보다 더 좋은 나눔도 없을 것입니다.
 
나눌수록 가난해지는 게 아니라
나눌수록 하느님으로 가득 차는 텅 빈 충만의 삶,
이게 진정 내적부자의 삶입니다.


셋째, 만족하십시오.

늘 나눌 때 만족한 자족의 삶입니다.
 
자족의 지혜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존재자체로 부자요 복덩어리입니다.
 
탐욕에 눈이 가려 거지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경쟁에 휘말리는 한 자유는 요원하며
언제나 가난뱅이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기본적인 최소한도의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부자로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바로 자족의, 지족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 스님의 ‘지족암(知足庵)’이란 암자 이름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분수를 지켜 족한 줄을 아는 구도자의 방’이란 뜻입니다.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자족(自足)’도 같은 뜻입니다.
 
제일 알기 어려운 것이 자기이기에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자족의 사람,
지족의 사람이 진정 무욕의 겸손한 현자요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러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주님을 알아야 지족의 겸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폐쇄적인 자족이,
지족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겸손으로 활짝 열린 자족이요 지족의 삶입니다.
 
바로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하시고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지혜로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고 아주 실제적이며 구체적입니다.
 
비상한 영성이 아니라
이렇게 상식과 양식의 기본이 튼튼해야 건강한 영성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자족의 삶, 지족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우선적 자질이 기쁨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기쁨의 맛으로 살아가십시오.
기쁨의 맛은 바로 하느님의 맛입니다.

나누십시오.
나눔은 기쁨의 열매입니다.
결국 우리의 최고의 나눔은 하느님의 나눔입니다.
 
진정한 나눔을 통해 결국은 하느님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족하십시오.
결국은 하느님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하나 만으로 지족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기쁘고 만족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생명과 사랑의 축복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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