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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315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4 조회수377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사제 학자 기념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은 광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였으므로 복음 선포의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광장에서 누가 뭐라고 한들 규제할 수 있는 율법은 없었으므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율법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권한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누구에게 가르치려면 말씀에 권위가 있어야 민중들이 모여들 것이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연설을 한다하여도 민중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기에 많은 민중들이 모이고 있었으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긴장하였음을 알 수 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시므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며 권한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어느 누가 이런 상황이라면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로 대항할 것입니다. 이런 기본권은 하느님이 저희에게 주신 천부인권입니다.

예수님께서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설명하여도 당시 그들의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도 없으므로 그들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질문인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며 물으신 말씀은 지금 저희들도 답변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기본권은 천부인권에 해당되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민중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사람으로부터 온 것으로 답하면 민중들의 분노가 무서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천부인권을 부인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에 스스로 진퇴양난에 빠진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생각은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얼인 智가 온전히 발현되는 是非之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씻음으로 없어지는 것이며 하느님께 제물을 받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씻는 것이 세례이므로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하느님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계신 것은 당시 그들의 정서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분이 예언자이기 때문에 민중들이 생각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가 알려준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에 요한의 세례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자비하시고 온전하신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알려주시고 계셨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라 할 것입니다.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인 1세기 후반의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지금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신경은 아직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삼위일체 교리는 325년 니케야공의회에서 공인되고 그 후에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추인됨으로써 우리 그리스도교의 정식 교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교리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여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라고 왜 속 시원하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습니다. 예수님은 수난을 당하실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당신이 알고 계신 ‘하느님의 뜻’을 숨기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계산도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오직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말씀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신 말씀이 오늘 묵상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나도 모른다.’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으며 내가 할 일은 내가 깨달은 ‘하느님의 뜻’을 민중들에게 알려주라는 천명을 따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마태 10.26)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계셨으므로‘하느님의 뜻’을 민중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천명을 받은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을 알았으면 ‘하느님의 뜻’을 알려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될 수 있으므로 이를 알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 은 영원히 감추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 나가는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신비를 벗겨나가는 것이 과학이며, 지금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신비를 벗겨나가는 사람들이 위대한 과학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이전의 문맹사회에서는 지금과는 달리 하느님을 독점한 자들은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많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려다가 박해를 받았고 그 길을 예수님이 이어 밟고 계시며 우리 그리스도교가 탄생된 이후에도 이런 역사는 계속하여 이어져 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의해 박해를 받았으며 이단으로 정죄된 숱한 사람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음에도 우리 그리스도교가 독점하므로써 인류에게 숱한 불행을 안겨줬습니다. 영원히 미지일 수밖에 없는 하느님을 우리 그리스도교가 독점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류가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존속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추구해야하는 영원한 진리이고 가치이며, 예수님은 이미 이를 알고 계셨음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무슨 권한으로 복음을 선포하는지에 대하여는
말씀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불민한 저는 ‘하느님의 뜻’을 알았으면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뜻’인 창조의 신비가 계속하여 알려지고 있으나
모두가 부분적으로 알려지고 있으므로
온전하신 하느님의 뜻이 잘못 전달되어 오만한 인류에게 재앙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지켜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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