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4 조회수609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루카 3:10-18)
 
빅터 프랭클(Viktor Emile Fankl) 박사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인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에서는 잔인한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을 그리고 있다. 유대인들이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 중 가장 큰 고통은 기다림의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애타게 알고 싶어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하면서, 석방되기를 기다리는 고통이었다. 이러한 수용소 생활을 통하여 그는 망가진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확고한 유형으로 짜 만드는 치료이론으로서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주창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메시아를 기다렸다.
이런 고통 때문에 유대인들은 희망을 잃기도 하고 믿음을 잃기도 했지만 묵묵히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이라고 한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도 하고 서로를 동화시키기도 하며 긴 세월을 참아내지 못하면 민중의 궐기와 반항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대림시기는 말 그대로 기다림의 시기이다. 스피드 시대를 맞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기다림은 고통이다. 시간을 아껴 쓰지 않으면 그리고 서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질 것이라는 하는 두려움이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파스칼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들의 모든 고통은 방안에서 5분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파스칼이 17세기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1분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무엇 때문에 바쁜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바쁘게 쫓아다녔지만 목적의식이 없었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말했다.
주어진 대로 살고 봉급으로 만족하라.” 탐욕적인 사람은 기다릴 줄을 모르고 호의호식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은 아랑곳하지도 않으며, 기쁨도 모른다.
그들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쾌락이다. 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듯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어려운 시절을 모르고 잘 놀라지 않는다. 기적을 모른다는 말이다.
오로지 배부른 것만 바란다.
 
어제 아론의 집에서 안토니오 신부님이 예레니모 성인의 예화를 말씀하셨다.
예레니모 성인 (St. Jerome, 340-420)은 고대언어와 고대사에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궁 재판관이 되는 등 세속적 욕망을 충족 시켜나갔습니다.
어느 순간 세상의 허망함을 깨달은 그는 자기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마침내 베들레헴 인근 사막에 기거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려 지난 날을 속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아름다운 소년이 나타나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이제야 돌아온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느냐?’
순간 그 소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린 성인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제 마음과 사랑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이 대답이 미흡했던지 소년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성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제 모든 재능을 바치겠습니다!’
여전히 응답이 없어 성인이 여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제가 무엇을 드려야 하나요?’
네 모든 죄를 모조리 내게 넘겨라! 그리고 너는 죄 없이 살아가거라!’
성인이 바치려고 했던 ‘마음과 사랑과 재능’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좋아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에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우리들이 죄를 지어 불완전하게 되어 항상 완전함을 찾는 존재가 되었다.예수님은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인간을 결합시켜 다시 완전함의 지위를 돌려주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만큼 더 완전해지고 죄 이전의 ‘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세상 마지막 날에는 죄에 물들지 않은 육체를 받게 된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통해서 마음이 병들게 된다.
 
예레니모 성인에게 계시된 말씀처럼 모든 죄를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매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판공성사를 해도 모든 죄를 고하지 않기 때문에 병이 낫지를 않는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무거운 죄를 껴안고 힘겹게 살지 말라고 하신다.
너무 무거워 자기 영혼이 질질 끌리는데도 그냥 무시하며 살아가는 자, 속은 썩어가고 있는데도 겉만 말쑥하게 치장한 자, 그들은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사람이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지난 과오에 대해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과거에 주저앉아 자기 영혼을 포기하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의 교만이요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야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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