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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큰 아들인가 작은 아들인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5 조회수462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오 21:28-32)
 
이 우화는 탕자의 우화와 너무나 비슷하다. 두 우화에서 작은 아들은 처음에는 잘못을 범하고 나중에는 회개하는 죄인을 뜻하며, 큰 아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의미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잘했지만 나중에는 악을 저질렀다. 작은 아들은 하느님 가까이로 다가갔지만 큰 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가 ‘아니오’하고 부정할 때에는 단순하게 그렇게 말한 것 같지만 자아(自我)가 그렇게 말하도록 시킨 것이다. ‘아니오’라는 말 안에는 ‘독립’, ‘경계선을 긋는 것’, ‘개성’, ‘도전’ 등의 뜻이 숨어 있다. 물론 살다 보면 때때로 ‘아니오’하고 말해야 할 필요도 있지만 어쩔 수 없어서 ‘아니오’하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린이가 두 살이 되면 일시적으로 ‘아니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를 ‘개별화(individuation)’ 또는 ‘에고의 탄생’이라고 부른다.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에고가 힘을 얻게 된다.
이는 피부가 자라는 것처럼 어린이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너무나 연약해지고 만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피부 아래 깊은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 깊은 내면을 잊어버리고 피부만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항상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니오’라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첫 번째 본능은 낯선 것이나 새로운 생각이나 눈에 익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이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저항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외로운 인생길을 걸어가게 된다.
 
5세기의 익명의 작가가 쓴 『The Incomplete Work on Matthew』에는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마음 속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 말했다. “우리가 ‘예’라고 말할 때에는 어떤 것의 한 부분이 됩니다. 이는 자아를 잊는 즉 무사(無私)무욕(無慾)을 뜻합니다. 이는 종교에서 가장 핵심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오’에서 당신의 주체성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하여 ‘예’라는 자세로 당신의 주체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피앗(fiat)’이라고 응답하신 것은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이다. 성찬기도와 모든 기도의 끝에 ‘아멘’하는 것은 ‘예’를 뜻하며 ‘예’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오’보다 더 나쁜 것은 거짓으로 ‘예’하는 것이다. 끝까지 내면의 소리 즉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아니오’라고 말하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어 외톨이가 되고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버림을 받게 된 후에야 그 고통으로 인하여 ‘예’하게 된다. 이는 어려운 과정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예’하게 되면 이런 과정을 겪지 못하게 된다. 신앙의 가르침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고도 ‘예’라고 답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아니오’보다 더 나쁘다. 힘차게 ‘아니오’하고 말해도 고통을 겪고 난 후 결국은 ‘예’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히 공손하게 된다.
이른바 순화(純化)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으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우둔함을 말하고 있다. 구원의 첫 번째 조건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우리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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