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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99) 사제의 자리는!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8 조회수448 추천수1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6853             작성일    2004-04-14 오후 2:29:26
 

2004년4월14일 부활 팔일축제 내 수요일 ㅡ사도행정3,1-10;루가24,13-35ㅡ

 

  (99) 사제의 자리는!

                                   이순의

            

ㅡ채워 주세요.ㅡ

한국교회공동체의 사제이시면서 GoodNews에 눈팅이라도 참여하시는 신부님들께

(이하 신부님께)

안녕하세요? 신부님.

잘 계시지요? 또한 잘 계시기를 빕니다.

신부님께서 잘 계셔야 교회가 잘 계시는 거잖아요.

오늘의 독서는 겸손하신 베드로의 기적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저는 신부님께 베드로의 모습을 청하기 위해서 외람된 소견이자 역시 생각 해 주시

기를 비는 묵상을 쓰기로 했습니다. 또한 신부님의 개인 묵상 중에 한 번쯤은 생각해

보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신부님

저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미사강론을 받아 적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가 아기를 낳아서 안고 다녀야 하는 시기와 녀석의 재롱이 미사에 집중할 수 없도

록 분주했던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자생활동안 미사강론을 적어왔습니다. 그래

서 저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신부님들의 강론집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꽂이 반개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쬐금 건방진 소리를 하자면 신부님들의 강론준비의

성실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증거물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꽂이에는 강론만 들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순절 특강이라든지 제가 외부

에 가서 듣고 배워 온 많은 강의들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무슨 생각이 떠

오르면 묵은 노트들 속을 뒤져서 그때 그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었다는 좋은 기억

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말씀을 때로는 며칠씩 보고 또 보다가 좀 소원해져서

노트가 굴러다닐 때쯤이면 다시 제자리에 꽂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들었던

주임신부님의 강론은 아무리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더라도 변화의 유무를 확실하게

체감 할 수 있었답니다.

신부님께 겁을 주려고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아니고요. 제가 강론을 들으면서 느끼는

신자의 입장을 전해드리고 제 개인적인 소망을 알려보고자 이 묵상 글을 쓰는 목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어떤 신부님이나 신부님이면 무조건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제의 삶이 복되다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신부님의 개인적인 모든 것을 접고

사제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것이 복된 삶이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마음상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잠시 신부님께 적응하기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는 이동이 되셔서 가시고 오시는 시기입니다. 말씀의 재능을 떠나

신자들은 계시던 신부님의 강론에 젖어들기도 하고 훈련되기도 하며 몇 년 동안 가슴

을 열고 살다가 정든 신부님께서 가시고 새로 낯선 신부님께서 오시고 할 때 강론에

대해 자기의 생각들이 가장 많아집니다.

말주변이 뛰어나신 신부님이 계시다가 가시고 나면 새로 오신 신부님께서 보통 수준

은 되신다 하더라도 강론에 제동을 겁니다. 그렇다면 말주변이 약하셔서 몹시 어눌하

신 신부님께서 가시고 쇠 소리가 쩌렁쩌렁 나시는 신부님께서 오시면 그 제동이 없어

야 하는데 신자들은 그대로 또 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가신분과 지낸 시간들이 신자

들의 마음을 정으로 채워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부님들께서 이동하는 시기

는 신부님들도 힘이 드시겠지만 신자들도 알게 모르게 나름대로 묵은 정을 벗고 새

정을 만드느라고 강론에 대해 한마디씩 거드는 시기가 바로 인사이동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겠지요. 신자들은 강론이 부족하면 정으로, 정이 부족하면 못된 성

깔이라도 매력으로 받아들이며, 좋다고 마음을 열고 신부님 신부님 우리신부님 곁에

서 또 한 시기를 잘 보낸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잘 모르는 것이 몇 가지 있어요.  

첫째 신부님들은 늘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대할 거라는 것

둘째 신부님들의 강론은 그날그날 준비 하실 거라는 것

셋째 신부님들의 강론준비는 매번 다를 것이라는 것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두는 입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특히 젊으신 신부님들

은 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오랜 필기로 분석한 신부님들의 강론은

첫째 신학교에서부터 배우고 또 배우고 읽고 또 읽고, 미사 때도 읽고 미사경본에도

거의 성서적인 내용이 반복 되풀이 되고, 성무일도에서도 성서를 빼면 성무일도에 써

진 내용이 없다시피 하고, 지겹다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읽고 또 읽고,

말하고 또 말하고, 사제 생활을 좀 살다보면 작년에 한 것 올해 또 하고 내년에 또 하고,

지난번에 읽은 것 또 읽고 또 읽고, 지겨운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신부님이 계시다면 오

늘 당장 살아있는 성인품에 올려드려야 할 만큼 신부님들은 성서를 보며 늘 상 새로운

마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 반복의 지루함이 가시는 시기가 제 짐작으로는 개인의 차이

가 있으시지만 약20년을 살고 나야 그냥 젖어서 말씀에 젖어서 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제인데 젊어서는 사제 냄새가 나는 사제라면 중년을

넘으면 아저씨 냄새가 나는 사제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신부님들도 세월이 사제를 완

성해 가는 것 같습니다.

 

둘째 신부님들의 성서와의 반복된 생활은 준비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뭔지를 알게

되면 뭘 준비하나 고민 하실 만큼 답답해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시

작 하면서부터 오늘은 신자 석에 누가 끼어 있나 보시고 지난번에 성사 볼 때 개인적

으로 잘못 해 준 말이 있으시면 그 신자가 왔나 안 왔나 보시고는 비스끄므레한 강론

을 해서 간접적인 격려를 하시기도 하고, 단체 활동에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시

면 기회다 싶어서 하시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때로는 그 나마도 안 되셔서 강론을 안

해 버리는 신부님들도 많습니다. 신자들은 농담이라도 한마디 해 주시는 신부님을 원

합니다. 신자들의 대부분은 사제를 사석에서 대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강론을 듣지

않으면 신자들은 집전사제의 마음을 어느 것도 전달받지 못 하고 돌아갑니다. 물론 성

찬의 전례가 미사의 핵심이라고는 하지만 그 핵심을 위해 잔치를 이끄는 주인의 덕담

은 잔치에 온 사람들의 보람을 배가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강론을 매우 성실하게 준비하시는 老신부님의 강론을 비교분석 해 보면, 매번 반

복된 강론이지만 반복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매번 항상 감동적이

고 좋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5년 동안의 강론을 나열해 보면 그 날과

그 축일과 내용면에서 공통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작년에도

이 말씀을 똑같이 하셨는데 전혀 와 닿지 않고 다른 말씀만 감동받았지? 올해는 이 말

씀이 나에게 더 감동적이네! 할 만큼 같은 내용 안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예

를 들어 부활 팔부축일 수요일 미사강론을 5년 동안 기록해 놓은 것을 나열해 보면 거

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거의 변동이 없고 비슷한 복음이 등장하므

로 강론도 그 복음의 테두리를 벗어나 전혀 다른 강론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리일 뿐

만 아니라 외람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강론은 5년의 전례동안 크

게 달라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작년의 강론을 다시 가지고 나오셔서 읽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작년의 복음과 올해의 복음이 일맥상통하지만 말씀은 그 강

론 안에서 이루어지되 지금 오늘 이 시간에 맞는 새 강론을 준비 해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5년 동안의 강론이 일맥상통하지만 내용은 다섯 개가 모두 달라있다는 점입니다. 그

러니까 항상 같으면서 항상 다른 감동은 시대적 흐름에 약간의 변화를 적용하는 차이

를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이런 비교분석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늘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대하는 신부

님을 생각하고, 그날그날 신자 개인 개인의 심금을 울리는 마음을 읽어주시는 신부

의 강론에 감동하고, 해마다 반복되는 강론이지만 들을 때 마다 새롭다고 생각을 합

니다.

 

신부님

제가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평신도가 바라본 사제의 강론을 논문처럼 쓰는 이유가 있

습니다.

신자들은 사제를 향해 망각의 동물입니다.

제가 엄마인데요. 제 아들이 엄마가 했던 꾸중과 실수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마 엄

마라고 절대로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도 있겠지만 기억을 아예

안 나도록 하는 사랑의 결정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에게 "엄마"라고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사제는 직장인이 아닙니다. 엄마처럼 생활인 입니다. 집이라는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처럼 갈 곳도 없이 그저 사제관이라는 그 구렁텅이에서 살아야 하는 생활

인입니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제도 집

을 나가면 한가지의 극단적인 길을 선택해야 하는 엄마랑 똑 같은 생활인입니다. 신자

들은 자식이구요. 그래서 신부님의 실수나 부족함을 기억해 내지 않습니다. 기억 난다

해도 들추려 하지 않습니다. 들추는 신자가 있다면 어미가 불효자 자식 하나 두었듯

이 불효자 신자 하나 둔 것이지요.

이제 제가 신부님께 이런 무례한 글을 등장시키면서까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

밝히겠습니다.

저의 간곡한 청원이기도 합니다.

여기 GoodNews 게시판에는 제가 들어온 뒤로도 몇 분의 신부님들께서 묵상 글을 올

려 주셨습니다. 박상대신부님과 양승국신부님. 노우진신부님, 오상선신부님.

그런데 수도회 공동체의 자리 이동 탓인지 노신부님과 오신부님께서는 가끔 들리시

고 두 분 신부님의 적극적인 수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신부님께서 휴가(?)를 선포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양신부님께서 빨리 휴가를 끝내시고 다시 오셔야 하든지 아니면 눈팅만

하시는 신부님들께서 돌아가면서 올려주시든지 사제의 자리는 사제가 채워주셔야 한

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그 이유는 박상대 신부님의 묵상 글은 매일 복음의 성서적 이론을 올려주심으로 성서

해석의 오류를 방지해 주는 크나큰 깃발이 되고 있습니다. 글을 올리지 않는 분이라

도 많은 분들이 따로 성서를 공부하지 않고도 양질의 양식이 되어주고 있음을 부인하

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박신부님의 글에는 망각해져 가는 저의 신앙적 지식전달을 회

복시켜 주셔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반면에 양신부님의 글은 복음을 반죽해 주시는 맛을 주십니다. 물론 다른 묵상

글들도 양질의 반죽을 제공해 주시지만 제가 부탁 하는 것은 평신도의 복음묵상이 사

제의 복음 묵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몫으로 삶을 사시고, 말씀 또한 지

겨울 만큼 듣고 읽고 살고 기도해야 하는 사제의 묵상 글은 아무리 하찮은 글이라 해도

우리 평신도가 따를 수 없는 저변에 깔린 양념들이 우러난다는 뜻입니다. 신부님의 묵

상 글은 여기에 묵상 글을 쓰거나, 쓰고 싶거나, 읽으시는 모든 가족들의 기준이 됩니

다. 복음을 쓸 때는 이런 손맛이 우러나야 한다는, 감히 평신도가 흉내 내기 어려운 것

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님의 휴가가 빨리 끝나야 하거나, 아니라면 신부님의 자

리는 신부님이 채워 주셔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신자들은 근사한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가지고 있는 몸에 밴 그대로의 반죽을 원합니다. 그 반죽은 신자가 흉

내 낼 수 없는 양념입니다.

 

더불어 바라옵기를 쉽게 양신부님께서 돌아오실 수 없다면 GoodNews 담당 신부님께

서라도 이 빈자리를 채워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신자들은 이런 때 힘들어 합니다. 신부님 때문에 묵상 글을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당분간 상당히 힘들어 할 것입니다.

저의 오랜 강론을 받아 적는 분석으로는 신부님과 신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계

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늘 새로운 마음이 아니라서 미안한데 신자들은 신부님의 마음이 늘 새롭다

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만날 강론 준비가 고민인데 신자들은 그런 상관없이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

니다.

신부님들은 늘 같은 강론을 하시는 것 같지만 신자들은 매번 까먹고 작년에 하신 이야

기 올해 또 해도 충만한 은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

신부님 생각만 하지마시고 제발 신부님의 자리는 신부님이 지키셔야 합니다.

엄마가 엄마노릇에 밑천이 바닥났다고 휴가가면 집구석이 어떻게 되나요?

잘 아시잖아요!

말씀과 함께 생활하시는 생활인 사제의 자리는 사제가 채워주셔야 합니다.

사제직이 엄마자리 보다 더 좋은 자리네요. 사실 부럽습니다.

휴가도 갈 수 있고.

나도 사춘기 아들땜시 힘들어서 섬 집에 일주일만 보내 달라고 졸라도 이 녀석이 잡아

먹으려고 해서 못 가는데........

양신부님, 모처럼 좀 시간적 여유를 원하시는데 이런 글 올려서 죄송합니다.

두 분 신부님께서 잠을 아끼시며 자정을 넘는 시간에 글을 올리시는 걸 보며 측은지

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이 GoodNews에서 제일 이잖아요. 수고 하셨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을 기다립니다. 노우진신부님도 오상선신부님도 기다립니다.

 

저 같이 강론을 몇 년씩 기록해서 비교분석하는 신자는 없어요.

언제 신부님께 신자들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이런 묵상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특별한 신자들도 몇몇은 계시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냥 신부님이니까 좋아해요.

그냥 신부님이니까 사랑하고 섭섭하고 기다리고 바라고 그래요.

양들에게 너무 큰 걸 해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은 신부님이시고, 뒤로 숨는 분도 신부님

이에요.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가난하고 별 볼일 없어도 엄마니까 아들이 좋아

하고 섬 집에도 못 가게하고 사랑하고 그래요. 너무 큰 걸 해 주고 싶은 게 엄마고 형

편은 안 되서 한숨짓고 미안하고 그러는 것도 엄마예요.

외람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건강하세요.

 

이것도 묵상 글이네요. 제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미사 중에 가슴에 담고 주님께 바라

는 마음이었으니까 간단한 묵상은 아니에요.

제 글을 묵상이라고 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는데요. 묵상 맞아요.

신부님들이 교회를 이끄시는 주역으로서 신자들에게 강론을 그럴싸하게 잘하지는 않

더라도 열심히는 해 주시기를 바라는 오랜 묵상이네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노트들이

제게는 한 분 한 분의 신부님들을 두고두고 만나는 깊은 인연이랍니다. 그런 만남이

이런 묵상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건강하세요. 저의 바람보다 주님의 뜻을 또 기다릴게요.

 

ㅡ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

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사도

행전3,6-7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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