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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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저녁 미사 / 다 아신다 / [복음과 묵상]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3 조회수421 추천수1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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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즐거운 성탄과 힘찬 새해를 맞으시길 바랍니다 ♬♪♬♪
♬♪♬♪♬♪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귀하게 여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하나만을 가지고 여기 있습니다.
지난 세월, 탕자처럼 방황하며 아버지의 맘을 아프게 했고
이제 먼 길을 돌아 다시 아버지 집에 돌아왔습니다.
작은 풍랑에도 쓰러지곤 했던 연약한 모습 그대로이지만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결코 뒤 돌아서지 않겠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영혼의 친구

주님, 당신은 나의 영혼을 만지는
유일한 분입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웃고 있지만
깊은 절망 가운데 있는 나의 영혼을
단번에 알아보시는 당신은,
내 영혼의 유일한 구세주입니다.
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늘 한결같은 사랑으로 부르시는 주님.
나 또한 평생 변함없는 마음으로
당신만을 바라게 하소서.



주님만을 바랍니다

고인 물이 결국 썩는 것처럼
멈춰 있는 신앙은 교만을 불러와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멀어지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사라지고
첫 신앙의 열정은
형식적인 습관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안전하다 여기는 형식의 신앙에서 벗어나
세상 가운데로 힘차게 흐르는
주님의 샘으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영이 구원의 기쁨가운데 새롭게 되길 원합니다.



고독이 주는 유익

하느님과의 독대의 시간.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실한 자신과 만나게 됩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포장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연약함과 상처들을 드러내게 됩니다.
광야에 홀로 남겨진 듯
고독의 시간을 견디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은혜의 시간,
주님과의 독대의 시간입니다.
주님의 세밀한 음성 가운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참된 치유와 회복을 통해
강한 군사로 거듭나십시오.



다 아신다

옳은 일을 행하고도
세상으로부터 비판과 조롱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상처와 부끄러움으로 인해
선을 행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잘못된 선택을 했노라 조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
“나는 다 안다”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판단을 따라 하느님의 자리를 피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음성을 따라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같은 자리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찾을 때
때론 주님의 오랜 침묵과 부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인간적 판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 곁을 떠나 방황할 때에도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치 않는 주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늘 같은 자리에 계시는 주님.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깊은 외로움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항상 같은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계획입니다.
지금 당장은 먹구름이 가리워진 듯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과 인내로 견디어낸 시간들로 인해
더 강해지고 담대해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먼저 지금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춰야 합니다
.
그리고 걸어 온 길을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소중한 것들을 버려두고 온 길.
그 길을 따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품에서 참 행복을 느꼈던 그 순간으로,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라 고백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
십자가를 따라 걷는 길이 좁을지라도
그 길이 참 생명의 길입니다.


너무 바빠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에 바쁜 일상.
심지어 주님의 일을 할 때조차도
나의 생각과 계획이 앞서 갑니다.
분주함 속에 참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나의 모습
주님은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린 이 시간,
일상의 분주함속에 묻혀 주님을 외면했던 나의 모습 뒤로
내 등만 바라보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
그 사랑만이 나를 살게 함을 고백합니다
.


주님께 하듯이

때론 나의 삶을 세상의 기준에 비춰보게 됩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와 별다를 것이 없는 일상은
우리의 마음을 실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라볼 때
결코 반복되는 하루도,
별다를 것이 없는 일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로 변화된 삶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


죄를 묻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혹시 '사랑' 보다는 '죄'를 이야기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아닌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기 전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은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먼저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죄를 묻기 보다는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람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진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새벽종소리 참조)




[12월 24일 (목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저녁 미사]
거룩한 생명의 말씀 '복음' 
[마태 1,1-25 <또는 1,18-25>]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복음]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의 첫 장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과 예수님 사이를 연결해 주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로 세 분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세 구절에 등장하는 ‘타마르’와 ‘라합’과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라합은 유다인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가나안의 여자였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정상적인 관계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세 여인도 구세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의 ‘판단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마침내 구세주께서는 ‘나자렛의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로 세상에 오십니다.

그런데 장차 성가정의 보호자가 될 요셉 성인도 마리아의 잉태를 ‘세상 기준’으로 생각하고 고뇌에 빠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은총의 이끄심이 없으면 아무도 예수님의 성탄을 믿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판단 기준에 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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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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