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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19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4 조회수575 추천수7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 신앙과 결단

 

 제 3 장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

 

 2. 믿음의 모델 (아브라함과 마리아)

 

“성서는 아브라함을 이러한 복종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동정 마리아는 이러한 복종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한 분이다.” (CCC: ‘가톨릭 교회 교리서’ 앞으로 약자로 사용하겠습니다: 144)

“아브라함은 히브리서가 제시하는 신앙의 정의(定義)를 실현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사물의 근거입니다’ (히브 11,1).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이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로마 4,3). ‘굳은 믿음’ (로마 4,20)으로 아브라함은 ‘장차 믿게 될 모든 이의 아버지’ (로마 4,11. 18)가 되었다.” (CCC 146)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느님을 믿었기에 믿음의 모델이 된 것일까요?

바로 이성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갑작스럽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떠납니다. (히브 11,8). 아마도 신약에서는 이집트로 피신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뜻에 절대적인 믿음을 보인 ‘요셉’의 믿음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두 분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방인의 땅에서 순례자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성소 (聖召)’, 즉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은 갑자기 원하지도 않았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미지에 대한 세계의 불안감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는 믿음,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부르심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히브 10,7.9)

하느님은 이런 절대적인 순종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손님을 정성껏 대접합니다. 이 세 분의 손님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 사라는 그 약속을 믿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믿습니다. 사라는 신약의 즈카리야 사제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사악을 얻게 됩니다. 이 믿음은 성모님의 믿음으로 완성되게 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100살이었고 사라는 그보다 10살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순결한 처녀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합니다. 믿음은 자아를 버리는 완전한 ‘무아 (無我)’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이 ‘無’안에 無만이 담을 수 있는 ‘전부 (全部)’를 선사하십니다. 내 자아가 無가 아니고 어떤 ‘무엇’일 때는 그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온전히 부수어 죽어 없어지셨습니다. 無가 되셨습니다. 그것이 빈무덤 입니다. 그러나 빈무덤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빈무덤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한 빈무덤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체’가 되는 영성입니다. 이 영성을 천주교순교복자회는 ‘면형무아 (麵形無我)’라는 짧고 완전한 말로 표현하고 지향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곧 자신을 비우는 ‘순교’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은 바다의 모래알처럼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던 약속을 잊으신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하십니다. 바로 독자 이사악을 재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산으로 떠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창세 22,3). 주저함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완전히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악을 통해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바보’처럼 자신의 ‘이성’을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아 산 위에 바로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사악의 모양으로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정말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성’을 버렸던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제물로 바치는 아버지나 아버지의 뜻에 순순히 따르는 아들이나 두 분의 믿음을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써 믿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있으셨을까요? 그러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새로운 조상이 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자신을 버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는 그 분의 단 몇 마디로 능히 짐작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와 같이 자신을 버리는 믿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성체’로 사용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죽여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셨듯이, 우리 자신의 교만을 죽여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성모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뛰어넘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세상 모든 믿음을 초월합니다. 성모님의 절대적 믿음의 순종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내려오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허공을 울리는 ‘말씀’이 아닌 공허한 소리로 사라지셨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듣지를 않았습니다. 들어주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 세상에 잉태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흠도 티도 없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이 없으면 가르칠 수 없고 학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처럼, ‘말씀’은 성모님의 온전한 믿음의 ‘순종 (ob-audire)’이 있으셨기에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님과 그리스도는 ‘한 몸’을 이루게 되었고 성모님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모델이요 보이지 않지만 하나의 순결한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 신비는 아무리 묵상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고 우리가 배우는 교리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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