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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난봉꾼에서 성인이 되기까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4 조회수602 추천수2 반대(0) 신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182년 부유한 이탈리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10대 때에는 난봉꾼이었으며 20세에 군대에 가서 포로가 되어 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풀려나 집으로 돌아간 후 부(富)를 버리고 거리에서 복음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특히 많은 젊은 사람들이 카리스마적인 그의 일에 동참해주었다. 마침내 27세의 나이에 오늘날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수도회를 만들었다. 1226년 10월 3 44세의 나이에 맨땅에서 시편 141편을 기도하면서 죽었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 제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 사내들과 함께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저들의 진미를 즐기지 않으오리다. 의인이 자애로 저를 때려도 저를 벌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머릿기름, 제 머리가 마다하지 않으오리다. 저들의 악행을 거슬러 저는 늘 기도드립니다. 저들이 심판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제 말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 알리이다. 누가 밭을 갈아 땅을 파헤쳤을 때처럼 저들의 뼈가 저승 어귀에 흩어지리이다.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 제가 당신께 피신합니다. 제 영혼을 쏟아 버리지 마소서.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 제가 탈 없이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소서.”
 
어떤 사람이 빛은 연료를 필요로 하지만 어둠은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영원하다. 따라서 어둠이 빛보다 더 원초적이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우리는 어둠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느님을 빛이라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가 안 계시는 어두운 침대에서 무서워하며 하느님은 빛이라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우리는 성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둠보다도 빛이 더 원초적이라고 말한다. 어둠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빛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빛이 어둠보다 더 원초적이다. 하느님의 부재(不在)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은 생명을 주지 못하지만 빛은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준다. 모든 생물은 태양으로부터 빛의 에너지를 보관하고 있으며 빛의 형상을 띠고 있다. 우리 모두 빛 속에서 살고 있다. 곧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하고 말했다.(로마 6:11)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예수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루비라는 돌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빨갛게 물든 세상만 보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변모(變貌)의 의미이다. 우리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또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또는 친구를 바라보면서 몰입하여 자신을 잃어버려도 자기 자신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초월하여 어떤 것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 말을 하고 돈을 세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만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인들은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신성한 심연의 불꽃을 이용하시어 우리들의 영혼을 불태우신다.
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계도하시고 정화시키신 다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 독특하고 청정한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든다. 이렇게 완전히 달라진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은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느끼기도 어렵다.
즉 무척 경이로운 일이며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상태에서 빛을 받아 정화된 우리들의 영혼은 신성한 칠흑 같은 어둠으로, 태고의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된 것을 모른다.
하느님께로 빨려 들어 가 이제는 모든 것이 대등하게 되며 대등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심연(深淵)에서 우리들의 영혼은 길을 잃고 하느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게 되거나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게 되며, 하느님과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도 모르거나,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버려 모든 분별심(分別心)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 인이면 당연히 이런 경지를 경험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믿음이 약해서 이런 경지를 맛보는 그리스도 인들이 드문 것 같다. 우리 모두 작아짐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아지게 되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우리 모두 빛을 받아 하느님과 하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결코 우리들이 비현실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울러와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로 열심히 믿어 많은 사람들이 “빨갛게 물든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한 말은 시간을 초월하여 수 세기 동안 살아 움직이고 있다.
타울러가 우리의 살아있는 믿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타울러와 그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하느님의 가슴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내일은 성탄절이다. 창문이 없는 어두운 동굴에서는 세상에 온 빛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빛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예수회의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1907-1991) 신부가 말했다.
죽음은 무(無)로 바뀌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팔에 안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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