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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사랑고백, 아기 예수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5 조회수722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성탄 대축일 - 하느님의 사랑고백, 아기 예수님.

 

 

 

오늘 성탄 축하 중, 저희 노총각 형이 남긴 길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네 축복받는 성탄 되고 항상 건강 조심하고 올해도 나는 외로운 크리스마스가 되겠지만 예수님도 외롭게 오셔서 다행이야 ㅋ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 너를 생각하며 미사 봉헌할게^^”

이맘때가 되면 이성 친구가 없는 청년들은 함께 성탄 캐럴을 들으며 걷는 짝들을 보며 더욱 외로움에 빠집니다. 그런데 저희 형의 말처럼 예수님은 짝이 없는 싱글들에게도 위로를 주시는 군요. 아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가난하게,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외롭게, 소외된 이들의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소외되게 태어나시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아픔을 보듬어 주시기 위해서 가장 아픈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런 예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즐거운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시죠? 물론 모두 행복하실 것입니다. 분위기가 그래서 만이 아니라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을 보면 왠지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랑고백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으로 오고가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첫 사랑고백을 진지하게 받아 본 사람이라면 그 행복감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두 남, 여가 서로 좋아는 하고 있지만 눈치만 보고 있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이 속 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서 나는 떠나네!” 라는 유행가도 있지만 아무튼 무엇이나 어정쩡한 것이 가장 힘듭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사랑한다는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 때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합니다.

오늘 구유를 보면서도 사실은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뭐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보다 소중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 죄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랑고백’인 것입니다.

 

사랑고백은 큰 모험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그 사랑에 응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상대는 그 사랑고백에 자신도 사랑한다고 응답할 수 있고 응답을 회피할 수도 있고 자신은 미안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하는데 대답을 회피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올 때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매우 오래 갈 수 있고 나중에는 두려움이 앞서 다시는 사랑고백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받는 사람 또한 긍정, 무응답, 혹은 부정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긍정으로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이루 바랄 것이 없겠지만 무응답이나 부정으로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사랑이고 지옥은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사랑과 비슷하게 먼저 인간에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처음 인간들은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한 번 거절하고 에덴동산에서 뛰쳐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존심을 다 포기하고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두 번째 사랑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또 그분의 생애와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보고 듣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고백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커다란 숙제를 떠안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인지 무관심 할 것인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 중의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하느님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고백에 대해서 응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연인간의 사랑이 이루어져 행복하기 위해서는 짝사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느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인간들의 사랑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고백에 대한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연인들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서로 간의 믿음이 깨어지기 시작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하루에 백 번씩 사랑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어르신들 중에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사람을 너무 잘 믿으면 오히려 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그래서 거짓이 없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로써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유독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표현하심으로써 거짓이 없으심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뜻이고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져있는데 하느님의 의지는 사랑만큼이나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사실인지 아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믿기 위해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사랑고백을 할 때 “글쎄, 잘 믿지 못하겠으니까 설명을 한 번 잘 해봐!” 라고 말한다면 사랑을 고백한 사람이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믿음은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면 믿게 되고 믿지 못할 사람이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린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장난으로 아이들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 왔고 지금 부모님은 진짜 부모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믿지 않다가도 어머니에게 야단을 심하게 맞을 때는 ‘정말 주워 온 것이 아닐까?’ 혹은 ‘나의 진짜 엄마를 찾아 가야겠다.’라는 마음까지 듭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사그라지고 맙니다. 누가 설명해 주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의심 없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똑똑해서 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자신부터 바꾸어 나가십시오. 만약 많이 배워서 더 믿게 된다면 아이들과 노인들은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어린이와 같이 본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믿음은 생길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이젠 다른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삼각관계가 되었다면 누군가는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자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고백에 응답한 당신의 연인들에게도 결코 삼각관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34,14)

질투의 화신이 하느님입니다. 질투는 우리나라 칠거지악 중의 하나였지만 자신이 온전히 준 사랑에 대해 자신도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의 예를 들어보면 아기 예수님은 겨울의 혹독함과 밤의 고요함과 마구간의 가난함과 딱딱한 여물통에 놓이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과 반대되는 도시의 현란함과 무절제와 집착과 이기주의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베들레헴 마구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도시 아니면 시골 마구간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연인 간에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사랑해!”라는 말 대신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무엇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사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씀으로 자주 응답 드리는 것이 오늘 아기예수님께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사랑고백인 ‘믿음’ 안에는 우리의 ‘가난’도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마구간과 같은 가난한 마음에 태어나십니다. 하느님이 당신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셨다면 우리도 가장 소중한 것을 그 분께 드려야합니다.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바로 성전에서 봉헌하셨듯이 우리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어려운 것은 애정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봉헌하는 만큼 우리는 가난해지고 그만큼 그분과의 사랑이 완전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봉헌하셔서 성전에서 다시 찾으실 수 있으셨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또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고백입니다. 우리도 그분께 믿음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하여 그 분의 고백을 받아들입시다. 그래야 예수님 탄생의 기쁨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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