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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5 조회수373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2009년 12월 25일


요한 1,1-18.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분이 태어나자 동방의 세 박사가 예루살렘을 거쳐 와서 경배한 이야기를 합니다. 루가복음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 조사령을 언급하면서,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뉘었고, 근방에 있던 목자들이 와서 경배하였다고 말합니다.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여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그분의 출생에 관련된 정보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생명이 지닌 의미만을 설명합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워야 하는 하느님의 뜻이 그분의 삶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하느님이 주신 그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보게 하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에 마음을 빼앗겨 사는 사람은 그분의 생명이 발산하는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었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을 알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어떤 은총이며, 어떤 진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삶은 우리에게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은혜로운 분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율법만을 소중히 생각한 유대교는 심판하고 벌주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죄인에게 하시는 보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자녀를 용서하고 살리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면서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배운 법과 제도에 더 애착한 나머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마르코복음서(8,33)는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였다.” 이 세상 높은 사람들에 준해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진리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성령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다.”(20,22-23).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신약성서는 그것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합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느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합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믿고 가르치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류역사가 실천하는 원리, 곧 상선벌악(賞善罰惡)을 하느님에게 적용하여 하느님을 벌주시는 분으로 상상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실천하는 현행 고해성사는 13세기 유럽 교회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선포하는 성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은 그 성사를 통해서만 용서하신다고 말하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손에 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것을 자기에게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보장하신 권한을 가졌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자리 잡은 증오심이라는 어둠으로 하느님을 포장하여,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인류역사와 교회사 안에 그런 어둠의 횡포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참 빛이 세상에 왔지만,...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오늘 성탄이 말하는 진리는 인류 안에 있었던 그런 횡포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느님은 국가 혹은 종교 단체의 기득권자들이 하는 일을 보장해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연약한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가난하고 무력하였던 그분의 삶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느님의 진리를 봅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살리는 분이십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아주는 연약한 자가 되기보다는 강자가 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정의라고 부르짖습니다. 어둠 안에 사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살아계신 곳에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라는 하느님의 진리가 보입니다.


오늘 성탄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 하느님의 진리가 살아 있게 하자고 권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께서 알려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의 진리를 배웁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사람 안에 그 진리가 살아 있고 성령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생각나게 해주시는 성령이십니다(요한 14,26 참조). 


성탄이 우리에게 기쁨인 것은 하느님을 알려 주신 그분이 오늘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재물과 권력과 지위는 구약성서 욥서의 말을 빌리면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14,1-2)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입니다. 하느님은 그 어둠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우리에게 은총과 진리를 자유롭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 어린이의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그만인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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