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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암에 걸린 86세 어머니와 병상일기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8 조회수1,017 추천수1 반대(0) 신고
               암에 걸린 86세 어머니와 병상일기  
                                    자식농사에 대한 상념, 노모의 병상을 지키며




<1>

며칠 전 고(故) 김대중 대통령 추모시집 출간과 관련하는 글을 하나 올리면서, 그 시집에 수록된 내 시를 소개한 바 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내 노모의 병환에 관심을 가지신 독자 두어 분이 내게 문의를 해왔다. 그 분들은 내가 지난 10월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대체의학으로 암세포를 이겨 가시는 어머니>라는 글의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 크다.  

그분들께 그 후의 상황에 대해서 대략 설명을 드렸지만, 이 기회에 내 노모의 병상생활과 관련하는 글을 하나 써볼까 한다.
 

▲ 할머니를 보살피는 아이들 / 노친께서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계신 11월 한 달 동안 대학생 딸아이와 아들녀석이 교대로 할머니의 병상을 지켜 드렸다.  
ⓒ 지요하 / 호스피스 병동

지난 10월말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시를 지어 '한국문학평화포럼' 관계자에게 보낼 때만 해도 내 노모의 병세는 양호한 상태였다. 노친께서 암을 이겨 가시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는 느낌으로 나 자신을 격려했다.

노친을 모시고 노친께서 즐기시는 '아구탕' 집에도 가고, 주일마다 아침미사에도 가고, 덕산온천에도 가고 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했다. 아내와 함께 하는 대체의학 활용으로 노친을 암세포의 고통으로부터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11월로 들어서면서 뜻밖의 상황이 빚어졌다. 노친께서 갑자기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하면서, 나는 11월 2일 노친을 모시고 서울성모병원으로 갔다. 완화의학과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시켜 드린 다음 일단 정밀 검사를 받았다.

폐는 괜찮고 고관절에도 이상이 없는데, 골반 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골반 뼈에도 암세포가 붙어 진행 중인데, 그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어 다시 걷게 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걸을 수가 없는 노친은 병상에서 용변을 보아야 하니, 입원 다음날부터 줄곧 소변 줄을 달고 기저귀를 착용해야 했다.

엑스레이 촬영만으로도 폐 상태는 알 수 있었지만, 골반 뼈 상태를 확실히 알기 위해 CT촬영과 MRI 촬영까지 해야 했다. CT와 MRI를 찍기 위해 두 번이나 조영제가 투입되고, 병상에서만 생활하여 운동 제한을 받게 되니 변비 증세가 왔다. 변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무려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또 대장에 숙변이 차니 폐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어 노친의 폐는 매우 커져버린 상태가 되었다.


▲ 병상 둘레의 풍성함 / 노친께서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던 때 하루는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과 안산에서 사는 누이, 누님의 피붙이들이 병실을 찾았다.  
ⓒ 지요하 / 호스피스 병동

노친은 11월 10일쯤부터 위험한 지경이 되었다. 의료진은 내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30년 이상 일을 하면서 환자들의 임종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신다는 이경식 명예교수님은 "지금이 고비인데, 이번 주 내로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돌아가시게 되니까, 가족들에게 올 사람은 오라고 하세요"라는 말씀도 하셨다. 또 호스피스 병동 간호수녀님은 임종이 임박한 환자의 가족들에게 실시하는 '교육'에 나를 부르시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노친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인체 안에서 폐와 대장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친의 폐가 갑작스럽게 나빠진 것은 대장의 숙변 때문이리라는 생각을 했고, 숙변이 배출되어 대장이 편해지면 폐도 좋아지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의료진은 관장을 했고, 관장 시술 다음날 노친은 많은 양의 배변을 했다. 하루에 배변을 여러 차례나 했다. 나는 노친의 대장에 차 있던 숙변이 모두 배출되는 것을 느꼈고, 새로이 희망을 갖게 되었다. 노친은 그때부터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2>

                  

▲ 친손자들과 외손녀 / 친손자들과 외손녀가 함께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 지요하 / 요양병원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꼬박 한 달 동안 병상생활을 하신 노친을 지난 달 30일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에 있는 '서해안요양병원'으로 모셨다. 태안읍에 있는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인 곳이다.

서울성모병원을 떠나오던 날 아침, 호스피스 병동의 이경식 명예교수님에게서, "지금 어머니 상태가 최상이에요. 가족들의 정성이 많이 작용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모시세요."라는 말씀을 들었다.

노친을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계속 계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병원 측에서도 퇴원을 권유하는 상황이었다. 태안의 의료보험조합에 문의하여 두어 곳 요양원도 알아보고, 서해안요양병원에도 미리 가서 상태를 보고, 서천에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운영하는 '어메니티복지마을'의 요양병원에 관한 정보도 상세히 입수한 다음 고민을 거듭했다.

일단 집으로 퇴원한 다음 의료보험조합 직원을 오게 하여 등급 판정을 받고 비용이 적게 드는 요양원으로 모시는 방안이 있었으나, 그것은 도리가 아닐 것 같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서해안요양병원은 병실 하나에 병상이 8개부터 10개까지 있어서, 24시간 교대로 일하는 간병사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서천 어메니티복지마을 요양병원은 6인 병실에 신부님도 두 분이나 계신다고 해서 그쪽으로 마음이 많이 갔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결국은 얼굴을 저었다.

근처에 어머니를 모셔놓고 수시로 왕래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고, 또 수시로 자주 왕래하며 어머니를 보살피기에는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이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월 70만원의 비용이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있는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으로 결정을 해놓고, 어머니께 잘 설명을 드렸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4인 병실에 계시다가 8인 이상의 병실로 가게 되면 유난히 예민하고 깔끔한 성격인 노친이 혹 충격을 받고 상심을 겪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여러 번 이해를 시켜 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응급 차량을 이용하여 어머니를 태안 서해안요양병원으로 모시면서 죄스러운 마음이 컸다. 어디까지나 '퇴원'이 아닌 '이원(移院)'이었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죄스러웠다. 제대로 서지를 못하시고, 부축을 받아 일어서신 상태에서도 전혀 걸음을 떼지 못하시니 집으로 모신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요양병원으로 모신 다음 혹 상태가 좋아져서 서너 발짝만이라도 발을 옮기실 수만 있다면 집으로 모시리라 작정하면서, 또 그것을 어머니께 주시시켜 드리고, 어머니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병상에서라도 간간이 다리 운동을 하며 사시도록 누누이 용기를 드렸다.    

<3>


▲ 손자의 할머니 사랑 /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할머니 병실부터 찾았다.  
ⓒ 지요하 / 요양병원

지난 6월초 어머니의 폐암과 갑상선 암이 판명된 이후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과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의 친정 방문이 잦아졌다. 매주 교대로 오기도 하고, 두 주에 한 번씩 같이 오기도 했다. 미국에서 사는 누이동생도 지난 9월초 6년 만에 친정을 찾았다. 대전에다 집을 두고 서천에서 교직 근무를 하는 막내 동생도 자주 전화를 하고, 주말에는 먼길을 달려오곤 했다.

한번은 서울성모병원으로 한 달 분의 약을 지으러 갔을 때 주치의인 완화의학과 염창환 교수에게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어머니를 보니까 사람은 그저 자식을 많이 낳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병환에 자식들이 자주 오니, 어머니가 자식 많이 낳으신 덕을 말년에 제대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자식을 많이 낳은 이유가 달리 있는 것 같아요."

염창환 교수는 내 말에 동의하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염 교수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내 혈육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안고, 노친의 말년 유복(?)을 은연중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 노친은 분명 자식 복이 있으신 것 같다. 그것은 노친의 말년에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질긴 가난 고통 속에서 하나같이 어렵게 키운 자식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가난을 체감하며 고생스럽게 자란 자식들인데, 그 자식들이 하나같이 노친께 효성을 다하니, 사람의 자식 복은 마지막에 규명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노친은 손주들 복도 있으신 편이다. 이미 장성하여 출가한 외손녀들과 외손자가 외할머니께 신경을 많이 쓴다. 친손주들은 늦게 보셨지만, 손주들을 늦게 보신 덕이 실로 크다. 손녀와 손자가 대학생이고 서울에서 생활하는 덕에,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계신 한 달 동안 두 녀석이 교대로 병실을 지키며 할머니를 보살펴 드렸다.

내가 혼인을 일찍 하여 자식들을 일찍 보았다면 이미 가정을 꾸려 가는 처지일 테니, 오늘처럼 할머니를 보살피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게 뻔하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혼인을 늦게 한 것이 천만 다행이다. 사정에 따라서는 간병인 손을 빌릴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환자는 그저 가족이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서울성모병원에 갈 적마다 병실 환자들과 보호자들, 그리고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내 아이들을 칭찬하곤 했다.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그대로 빼 닮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아이들에게서 부모들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 같다"는 말도 있었다.

내 아이들은 할머니의 정성스런 보살핌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밤중에 엄마와 아빠 옆에서 자다가도 배가 아프거나 하면 할머니 방으로 갔고, 할머니 방으로 가면 모든 게 해결되곤 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니 할머니와의 친밀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4>


▲ 숟가락질만 겨우 하시는 노친 / 아침저녁으로 요양병원을 가서 노친의 식사를 도와 드리며, 이렇게 식사라도 도와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면 목이 아려온다  
ⓒ 지요하 / 요양병원

어머니를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으로 모신 다음날부터 나는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간다. 하루 두 번씩 가는 것은 기본이고, 세 번을 가는 날도 많다. 자동차로 5분 거리인 가까운 곳에 모신 덕분이기도 하지만, 걱정과 불안과 궁금함 때문에 그렇게 자주 가지 않을 수 없다. 또 집으로 모시지 못한 죄스러움, 평생을 함께 살아왔던 가족과 떨어져서 생활하시는 노친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에 늘 좌불안석이다.

전에는 아침에 집사람을 학교에 출근시켜 준 다음 병원을 가고, 또 저녁에 집사람을 퇴근시켜 주면서 병원을 들러오곤 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시작된 후로는 병원의 아침과 저녁 식사시간에 맞춰 함께 가곤 한다. 노친의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도와 드리고, 휠체어에 태워 잠시 운동(?)도 시켜드리고 돌아온다.

노친은 기저귀에 변을 보시곤 하면서도 그것을 늘 부담스러워하신다. 간병사에게도 미안해하고 다른 할머니 환자들에게도 미안해한다. 내가 병원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시기도 한다. 노친을 휠체어에 태우고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앉혀 드리면 제대로 변을 보시고 시원해하시며 "오늘은 대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즐거워하시기도 한다.

때로는 기저귀를 미처 빼기도 전에 변을 보시는 경우도 있고, 이미 기저귀에 변을 보았는데도 기저귀를 빼드리면 다시 변을 보시기도 한다. 나 혼자 노친을 변기에 앉혀 드리고 뒤처리를 하기는 매우 힘이 든다. 아내와 함께 가거나 간병사가 따라와 도와주면 수월하지만 혼자 하려면 온몸에서 땀이 나고 손에 변이 묻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노친의 배변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병상에 편안하게 눕혀 드리고 와야 나도 마음이 편해져서 무슨 일이든 제대로 일손이 잡힌다. 폐암 환자는 변비와 설사가 교대로 온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어서 노친의 배변 상태를 관찰하고 간병사에게 물으면서 별도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노친께 계속 아침저녁으로 웅담을 드리고, 바이오 기공수기라는 기계 위에 4시간 이상 올려놓으면 광선의 작용으로 임산부 자궁 속의 양수 같은 성격이 되는 물을 계속 공급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수원의 모 대학교를 가서 모 교수님이 개발하여 현재 임상실험중인 암세포 억제 녹말을 얻어다가 물에 타 드리기도 한다.


▲ 노친의 운동 / 노친을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안을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이 일을 노친과 나는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 지요하 / 요양병원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셈이다. 일단은 노친을 어느 정도 회복시킨 다음 집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올해 86세이신 노친이 끝내 회복을 못하시고 돌아가실 경우 여한을 갖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또 비록 노친을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병고만이라도 심하게  겪지 않게 해드리려는 뜻이기도 하다.

병원을 다니면서 다른 할머니 환자들에게도 신경을 많이 쓴다.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내 노친을 부러워하신다. "비록 병실에 있긴 하지만 복이 많은 노인"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아드님이 너무 자주 오고, 정성껏 보살펴 드리는 것을 보면 샘이 나요"라는 말씀도 하셔서, 나는 이상한 걱정도 하게 되었다. 다른 할머니들이 정말 질투를 하게 되고, 부러움 때문에 상심과 슬픔을 겪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래서 다른 할머니들께도 깎듯이 인사를 하고 친밀하게 대해 드리고, 잡수실 것을 나누어 드리기도 한다. 집사람은 잡채와 녹두죽과 카레, 또 불고기를 차례로 만들어서 병실의 할머니들께 고루 나누어 드리기도 했다.

노친이 비록 말년을 가족과 떨어져서 병원에서 지내실 망정 조금도 섭섭하거나 슬픈 마음을 갖지 않게 해드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이 내가 지닌 생각이다.                                      

노친이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해 계실 때 우리 7남매 중 세 집 가족이 함께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전의 막내 제수씨가 이런 말을 했다.

"아주버님이 어머님께 하시는 걸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감탄도 많이 하게 되고…."

그때 나는 가족 모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자식을 나아서 기르는 것은 죽을 때 잘 죽기 위해서야. 자식이 잘 되고 출세를 하는 건 모두 자식에게나 좋은 일일 뿐이야. 부모에게 가장 좋은 일은 자식이 잘되는 것보다 죽을 때 자식 덕을 보는 거야. 죽을 때 잘 죽기 위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거,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09.12.28 11:47 ㅣ최종 업데이트 09.12.28 11:47
노친 병환, 요양병원, 호스피스 병동
출처 : 암에 걸린 86세 어머니와 병상일기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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