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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1 조회수1,008 추천수3 반대(0) 신고

주님 공현 대축일    2010년 1월 3일


마태 2,1-12. 이사 60, 1-6.


성탄에서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어린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 우리는 그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이교도들이 먼 이역에서 찾아 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몇 명인지, 베들레헴을 다녀서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어느 것 하나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자기의 배역이 끝나면 사라지듯이, 그들도 성서 안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물이 셋이기 때문에, 기원 후 500 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하시자 벌써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헤로데 왕은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음흉한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틀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있었고, 거기 길을 물어 자기 길을 가면, 말씀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한 송이의 꽃과 같이 길지도 않은 인생길을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허무로 돌아가지 않는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흙으로’, 혹은 ‘먼지로’(3,19) 돌아간다는 말로 그 허무를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숨결 없이 우리 삶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또 제 멋대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자기 안에 살려서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입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별을 보고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에 빠져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가서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간교함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의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다시는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다 하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마음이 있고, 길을 떠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꾸며주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져서 남을 지배하며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우리라면, 무엇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 앞에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런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십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헛된 망상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옛날의 헤로데와 율법학자들 같이, 오늘의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하고 때때로 간교한 주문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 사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실천의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실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 있게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말씀과 숨결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셔야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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