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펌 - (106) 그것을 모릅니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3 조회수531 추천수0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6980       작성일    2004-05-02 오후 10:12:01
 
 

2004년5월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 없음 ㅡ사도행

전13,14.43-52;요한묵시록7,9.14-17; 요한10,27-30ㅡ

 

   (106) 그것을 모릅니다.

                                        이순의

 

ㅡ성소ㅡ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중에서 침대를 나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저는 이 꿈을 절대로 누구에게 팔지 않습니다.>

수도공동체 가족들과 소풍을 갔다. 무릉도원으로! 그렇게 아름다운 무릉도원의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 자리는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고 의자를 놓고 앉아

서 꿈인데도 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고 앉았었다. 그동안 수도가족들은

자리정리를 하느라고 분주하다. 그런데 그 수도가족 속에 친정식구들이 간혹 들어 있

다. 왜 수녀원에서 소풍을 왔는데 친정 엄마랑이 들어있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 분위

기가 너무 정갈하고 엄숙하고 좋아서 아무 말도 안했다. 나는 내 자리를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에 앉아서 꼼짝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족 중에서 수도가족 침대

의 첫자리를 자꾸 나에게 가지라고 한다.

내 자리는 따로 있는데 자꾸 그 침대를 가지라고 한다. 아니라고 나는 저 자리가 더 좋

다고 해도 그 자리도 내 자리고 그 침대도 내 자리라고 걱정 말고 나더러 그 자리를 모

두 가지라고 한다. 나는 그 두 자리를 모두 가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

도 없이 너무 좋은 자리를 가졌는데 또 침대까지 첫자리로 가지라고 해서 부담스러운

데 나에게 걱정 없이 그 자리를 모두 가지라고 한다. 내가 차지하고 좋아하는 자리는

무릉도원이 넘실대는 풍경을 내려다보고 감탄하던 자리다. 받은 자리는 수도공동체의

가족들이 친정 식구들과 함께 소풍을 갔는데 숙식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한 그곳! 내가

내려다 본 무릉도원 윗자리 뒤로 첫 번째 놓여 진 침대 자리가 내 자리라고 한다.

꿈에서도 나는 자꾸 저 높은 자리가  무릉도원이 훤히 보여서 좋다고 하는데 그 두 자

리가 모두 내 자리라고 한다. 나는 저기 저 자리만 내 자리라고 해도 그 침대도 내 자

리라고 한다. 둘 다를 갖는다는 것이 불안한 마음을 아시는지 나 더러 안심하라고 그

두 자리 모두는 내 자리라서 누구도 넘보지 않으니까 걱정을 말라는 것이다. 그저 마

만 편안히 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꽃과 물과 산과 길이 조화를 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저 자리가 내 자리라고 해도 그 수도회 침대도 내 자리라고

한다. 둘 다 내 자리라고 한다. 모두가 내 자리니까 절대로 누구도 내 자리를 넘보지

않으니까 걱정도 말고 나는 그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하기만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얼굴 익은 동기 수녀님들은 뒤에서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분주하다. 침대도 수녀원 침

대 그대로이다. 수녀원 침대가 무릉도원 옆으로 이동되어 있다. 수녀원의 수녀님들은

수녀원에서와 똑 같이 침묵 중에 분주한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 안에 친정식구들도

똑 같이 분주한 수도가족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나에게 자꾸 그 두 자리 모두 내 자리

니까 가지라고 한다. 나는 침대 다리를 잡고 내가 정해 놓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가족들은 자꾸 안심하라고 한다.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

다가 깼다. 꿈이었다.

<저는 이 꿈을 절대로 누구에게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잦은 병치레와 수술로 항생제를 많이 복용하며 자란 걱정에도 불구하고 결혼

8개월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태기가 있었다. 친정 가족들도 시집을 보내놓고 병치레

하느라 사람구실을 못할까봐 걱정을 했었는데 너무나 반가워했었다.

그런데 그 무렵, 꿈에서 수도회 침대를 나에게 강제하시다시피 주신 친가 쪽 가족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문병을 갔다. 어디가 그렇

게 많이 아프시냐고, 빨리 쾌차하시라고, 문병을 하였는데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병치레가 잦았던 나의 태기를 기다려온 가족들이라서 쉬이 아기소식을 듣

지 못하자 쉬쉬 하였던가 보다. 그러던 차에 문병을 가서 나에게 태기가 있다고 안심

을 시켜드릴 수가 있었는데 나는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 침대의 주인이 침대를

쓰지 않겠다고 나에게 주셨는데 그만 유산을 했기 때문이다. 섬뜩했다.

 

꿈 때문이었다.

꿈 때문에 나는 아들에게 가혹한 엄마였다.

혹시 사제라는 성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엄격한 엄마가 되어버렸다.

강남이라는 치열한 성역에 살면서도 중학교 3학년을 마치도록 사설 학원에 한 번을

보내지 않았다. 학교에서 폭력에 시달릴 때도 그걸 자력으로 이겨야만 사람 속에서 살

아갈 수 있다고 냉혹하게 버텨버린 엄마였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엄마들이 신경 쓰는

것은 절대로 신경을 꺼 버리고, 요즈음 엄마들이 신경을 끄고 사는 것은 신경을 써서

쌍코피가 날 지경인 생활을 했으니 아들이 세상과 엄마의 훈계 사이에서 겪었을 마음

고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어미로서 그것을 알고 있다. 아들이 힘들었을 마음을

알면서도 절대로 굴하지 않은 독한 나를 알고 있다. 그래도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엄마다.

걸음마를 하면서 골목의 아이들과 장난감으로 다투는 시절부터 그토록 어린 아이에게

맞아서도 안 되고 때려서도 안 된다고 강요를 했으니 얼마나 혼란을 겪었겠는가?! 생

명의 소중함에 대하여 고등학생인 지금까지도 반복학습으로 입력을 시키고 있다. 사

춘기라는 왕성한 욕구의 계절에 여자생각이 깊어지면 먼저 자기의 몸에서 나오는 생

명을 먼저 생각하라고 일렀으니....... 어떠한 경우에도 내 몸에서 나온 생명은 죽이지

않고 살린다는 책임감을 먼저 결심하라고 강압하고 세뇌 시키고....... 아들 녀석은 나

쁜 짓을 하고 싶어도 안 되는 멍청이 아들이 되었다고 원망을 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남의 생명을 지배할 어떠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항상 귀히 여겨 존중할 줄 알

아야 하고, 더구나 살아있는 생명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더불어 내 목숨

은 하느님만이 주관자이시므로 관리를 잘 해야 할 책임 또한 나에게 주어졌다는. 그러

므로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나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되며, 타인에 의해서 발생되어질 수

있는 강제적 손상으로부터 항상 방어해야 하고 ,......

그래서 때로는 맞고도 못 때리는 성향 때문에 수시로 불이익을 받기도 했었다는 것도

엄마의 느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엄마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더 불호령이 떨

어지므로 어린것이 세파에 시달리느라고 방황도 많이 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오직 주

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께서만이 저 아이를 강건하게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제 아들이지만 제게는 아무

런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저 아이의 주인이시며 모든 위로가 주님 안에서 이루

지리이다. 아멘" 이라고.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엄마인 나의 마음이 더 먼저 변하고 있다. 신학교도 공

부를 잘 해야 간다는 것이고, 사춘기 아들의 경험 또한 눈을 뜨느라고 세상에는 엄마의

가르침보다 더 근사한 유동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꼬이기 시작한 시

련은 끝이 없어서, 아들에게 투자를 해 줘야할 시기에 어떤 놈은 짝꿍의 장사 밑천을

몽땅 떼먹고 도망을 가고, 우리 가족의 생활은 빈곤의 극치를 치닫고, 종교생활이 힘

들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교회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인정하고, 내가 내 스스로에

게 근신을 결심하고, 성당을 쉬어야 하는 엄청난 악제에다가, 토혈을 하는 건강의 악

화까지! 그리고 이제야 아들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투자를 하려고 해 보니, 너무너무

벅찬 현실에 삶의 주관을 돌아보고 후회 할 것인지 아니면 자포자기 할 것인지를 고민

하고 있다.

이제는 사제성소에 대한 나의 막연한 두려움은 없다. 주님의 뜻은 그 사람에게 가장

합당한 길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제의 길을 가든지 못 가든지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키운 아들

에 대하여 자부심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을 가도 대학을 못 가도 내 아들은

내 자식이며, 내 살과 뼈에서 나온 나의 보배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라는 가치가 나

에게 항상 최선이도록 인도한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의 것을 짜서 키웠으

므로 그 성소가 사제성소든지 혼인성소든지 아니면 또 다른 성소든지 상관하지 않고

어미가 키우는 정성에 대하여 최선을 다 했으므로 내 자식의 어떤 길도 달디 달다고

인정해 주고 싶다.

 

나는 안다. 주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각자에게 맞게 지정되어 있으며 주님의 사랑은

모두에게 넘치도록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또한 그 생명의 보관자는 본인이다. 본인이 알

아서 주님의 뜻을 따라 순탄한 길도 갈 것이고, 질곡의 험난한 길도 갈 것이다. 부모는

단지 18년 동안만 키워주는 대리자인 것이다. 대학을 가더라도 자기의 진로는 자기가

개척해 가야하고, 대학을 못 가더라도 길은 자기가 찾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부

모는 돈이 있으면 주고, 없으면 말아야 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그 자식을 바라보는 존재이면서, 또한 자식의 인생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 한다.

나는 나의 인생을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생각한 나의 인생도 있었으나 지금 현재, 내

인생의 절반도 더 살은 시점에서 돌아보면 나는 나의 인생을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서 "나" 라는 존재에게 가장 합당한 인도를 받아 살아온 것 같다. 그것에 순응

하였으므로 우리가족이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방황

을 하였거나 짝꿍이 술이라도 의지해 마셨다면 지금의 시련보다 더 엄청난 불행이 덮

쳤을 텐데 우리 부부는 주님의 뜻에 순명하였으므로 성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질

수 있었다. 주님의 뜻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 부부가 노력하는 한계조차도 극복되어

야만 가능한 일이다. 남이 우리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우리 부부가 우리를 보고 최선을

다 했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대답 할 수 있다면 그 어긋남에 대해서는 주

님의 뜻이라고 인정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열심히 믿고 의지하며

주님께서 허락하신만큼의 복에 감사할 때 삶은 만족할 수 있었고 풍요로워질 수 있었

다.

이렇듯이 내가 나의 인생을 내가 모르고도 행복하다고 살아왔듯이 나는 내 아들의 인

생은 더 더욱 모른다. 주님께서는 내 아들의 그릇에 잘 맞는 사랑이 있으시고 몫이 있

으시다 고 믿으며 내가 내 아들에게 공부보다 생명의 중요성에 더 집중해서 키워야 했

었던 이유가 주님께 있으리라고 믿는다.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더라도 생명에 본질을

두고 키우리라고 믿으며, 또는 사제의 길을 가더라도 그것이 필요했으리라고 믿고, 전

혀 상상을 불허한 길을 가더라도 심장 속에 내제된 그 가치가 중요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주님의 뜻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응할 수 있을 때 사랑과 행복

이 보장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주님, 저는 제 자식의 성소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저 안타까운 가슴으로 바라보는 어미일 뿐입니다.

아들에게 주님의 계획이 어떤 길을 부여하시든지 순명의 덕으로 일생을 행복이라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아비처럼 어미처럼 세상의 무게와 상관없이 사랑이라고 행복이라고 사는 몫을 주십

시오.

저희에게 사랑을 안다는 몫! 행복을 안다는 몫! 이 몫을 주신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

립니다.

제 아들에게도 그 몫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원하옵니다. 제 아들에게도 그런 몫이 있도록......."

 

ㅡ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

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

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

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요한10,27-29ㅡ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