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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여라, 들어라, 나눠라" - 1.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4 조회수403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4 연중 제3주일 
                                                        
느헤8,2-4ㄱ.5-6.8-10 1코린12,12-30 루카1,1-4;4,14-21

              
                                    
 
 
 
 
"모여라, 들어라, 나눠라"
 
 
 


약하고 불완전하기에 함께 삽니다.
 
강하고 완전하여
공동체를 떠나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삶이 외롭고 힘든 것은 대부분 혼자이기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더불어 사랑을 나눌 때
해소되는 외로움이요 충전되는 힘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선각자들은 공동체 건설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언제나 이상적인, 경쟁보다는 공생과 협력의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나눕니다.
 
어제 문병 차 외출했다가 점심때가 되어
식당에서 식사도중 옆 자리에서 식사하는 젊은 부부와 두 아이들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만 생각하며 맛있게 먹다가 옆을 보니
젊은 부부는 두 어린 자식들에게
자기 밥과 국을 작은 그릇에 덜어 먹여 주며 계속 챙겨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 먹었는데 아직 반도 먹지 못한 두 젊은 부부를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정성스럽게 밥을 먹이며
천천히 식사하는 젊은 부부가 참 존경스럽고 고마웠습니다.

‘아, 바로 저게 공동체구나.
  저 부부와 같은 젊은 나이에 혼자 산다면 자기 것만 챙긴 터인데
  저렇게 가정을 가지니 서로 배려하며 사랑을 나누는구나.
  같은 나이라도 부모가 된 사람과 부모가 되지 않은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겠구나.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혼자 자기만의 이기적 삶을 살다보면
  성숙하여 사람 되기는 참 힘들겠다.’

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얼마 전의 깨달음도 생생합니다.

세탁해 놓은 깨끗한 검정 양말을 신으려 하니
아무리 찾아도 한 짝이 없어 신을 수 없어
적당히 색깔이 맞는 짝을 찾으려 하니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옆에 한 짝의 회색 양말을 신으려 하니
한 쪽은 검정 양말, 한 쪽은 회색 양말 눈에 띌 것 같아 포기하고
새 양말을 신었습니다.

둘이며 하나, 바로 이게 공동체의 원리입니다.
 
아무리 좋은 양말도, 구두도 한 짝이 없으면
그 양말, 그 구두 아무 쓸모가 없어 결국은 버려질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나도 순전히 혼자 삶이라면
바로 짝을 잃은 한 짝의 양말, 구두 같아
뭔가 허전한 느낌 떨쳐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자명하고 평범한 사실이
그날따라 신선한 충격의 깨달음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모여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오늘 1독서의 유배 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우선 착수한 것이 성전에서의 공동예배였습니다.
 
에즈라 사제를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께 장엄한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대로 우리 교회의 미사 장면과 흡사합니다.

교회공동체가 모든 공동체의 원형입니다.
 
혼자 삶의 부족을 보완해 주는 교회공동체입니다.
 
혼자가 아닌 주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이 외로움을 해소시켜 줍니다.
 
우리의 진정한 한 짝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소속감의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공동체 관계 안에서 내 자리의 정체성도 분명해 집니다.
 
구체적으로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떠나면 ‘참 나’를 찾기도 힘듭니다.

이래서 교회의 공동 전례인 이 미사가 그렇게도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미사 공동전례를 통해 형성되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입니다.
 
혼자 사랑은, 혼자 믿음은, 혼자 희망은 너무 약해 곧 시들어 죽습니다.
교회공동체에 뿌리내려야 비로소 강한 사랑, 강한 믿음, 강한 희망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해’ 하느님 앞에 모여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약할수록 모여야 삽니다.
 
여기 사는 우리 수도자들 역시 ‘살기위해’
매일, 미사와 일곱 번의 기도를 위해 성전에 모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비단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살기위해’ 숫자에 상관없이
좋은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여
항구히, 규칙적으로 하느님 앞에 모이는 것은 필수입니다.
 
날로 황량해 가는 사막 같은 세상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역할의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성체성사가 거행되고,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기도가 올려 지기에 성전이요 수도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기도가 사라지면 하나의 건물일 뿐 성전은 아닙니다.
 
성전에서의 거룩한 미사 중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형제자매들입니다.
역시 살기위해 하느님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화답송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성전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에즈라 사제 역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에즈라 사제는 나무 단 위에 서서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섭니다.
 
그대로 미사 중 말씀의 전례에 해당됩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응답한 후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며 감격하여 우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에즈라 사제입니다.
 
에즈라 사제의 말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말씀 같습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 거룩한 날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말씀의 전례에 이어 맛있는 음식인 주님의 성체가 있고,
단 술인 주님의 성혈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회복되는 영육의 건강입니다.
 
다음 말씀은 얼마나 좋은 지요.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에즈라 사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주님은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성무일도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진정 우리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회당에서 성경을 봉독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은혜입니다.
 
가난한 우리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근심 걱정에 사로 잡혀 지내던 우리들이 해방되고,
두려움과 불안에 억압 받던 우리들이 자유로워지며,
무지와 탐욕, 교만에 눈 먼 우리들이
주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는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나눠야 합니다. 우리의 은사를!

서로 나누라 있는 공동체입니다.
 
존재 자체가 나눔입니다.
 
다 각기 다른 은사입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떠난 참 나의 발견은 환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의 지체가 참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 똑같은 지체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더 요긴하듯
약한 형제들이 더 요긴합니다.
 
모든 지체들을 소중히 돌보아야 합니다.
차별이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사실 한 몸의 공동체이기에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겪고,
한 지체가 영광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듯
‘살아있는 공동체’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몸의 지체마다 그 기능이 다르듯 형제들이 받은 은사도 다 다릅니다.
 
비교하여 우열을 가를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은사요
이 은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자기은사에, 자기소임에, 자기자리에 충실한 것이
바로 사랑의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모두가 사도일 수도 없고,
모두가 예언자일수도 없고 모두가 교사일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고
모두가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새삼 다르다는 것이 은총이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형제들의 은사의 풍요함은 바로 공동체의 풍요로움이자
하느님의 풍요로움입니다.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것이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주님 안에서 경쟁이 아닌
공생과 협력의 살아있는 공동체가 우리의 이상입니다.
 

모여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나눠야 합니다. 각자 주님께 받은 은사를!
바로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공동체 건설의 답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 앞에 모여 당신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필요한 은사를 선사하시며
살아있는 당신의 몸 공동체를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 없으리라.”
(시편34,6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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